(부민관 폭탄 의거) 조문기 선생 회고록



                                                일평생 독립운동에 투신, 광복회/반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16년 작고

 

서문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 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 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게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5년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민족 반역자)들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 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 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

 

엄밀히 말하면 8.15니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

 

매일 일본 황실을 향해 머리를 굽실거리며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치며 민족 구성원을 전쟁터로 내몰던 일제 관리들이 해방 후에 이 나라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식민지 민족말살교육의 첨병이었던 훈도들이 모조리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 일선 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민족을 배신하는 데 앞장섰던 성직자들은 여전히 존경받는 성직 지도자로 군림했다. 민족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고등계 형사들과 순사들이 모조리 국립 경찰의 간부가 되어 항일운동 세력을 낱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 경찰들의 손에 다시금 구금되어야만 했다. 항일 운동가들을 토벌하던 황군 장교들은 해발 후 빨갱이를 쳐부수는 국군 장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쿠데타로 군사 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이 땅 주류 세력의 뿌리가 친일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이 나라는 친일파들의 낙원이라 부를(불릴) 만하다. 친일파들의 철옹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실례를 보자.

 

지금 전국에서 친일파들의 동상, 공적비, 기념비, 송덕비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키워 놓은 후계 세력들은 친일파들을 본받고 따르라고 각종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60년을 공들여 쌓아 놓은 굳건한 친일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집권 세력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 보려고 칼을 빼들었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가로막는 친일 세력의 벽에 부딪쳐서 절절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친일파가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한 나라참으로 하늘이 무섭고 역사가 두렵고 선열들의 호통소리가 들리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 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3년 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이란 책에서 조문기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좌나 우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알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명성이란 것은 당초에 없었으니 그 말만 뺀다면 정곡을 찌른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내게는 이념도 사상도 조직도 없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상태로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독불장군에다 좌충우돌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 지난 세월도 꽤나 거칠고 험난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밍더지지 낳을 만큼 끔찍한 역경도 많이 체험했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다 보니 철부지의 치기, 영웅심에다 큰 목표에 대한 사명감이 맞물리면서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탓일 게다. 나이 80이 된 오늘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대로 산다. 그 실을 지켜 온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지난날에 (대한) 후회는 없다.

 

서툰 내 글솜씨가 이런 내 진솔한 민족애를 얼마나 담아낼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의 대부분이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 보니 행여 역사 한구석이라도 더럽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이 책을 내가 민족에세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라 생가갛고 역사의 한구석에 조용히 세워 놓고 민족의 품속에 안겨 눈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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