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문재인 정부 들어 맞이한 3·1절 주요 행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진행되었으며 광화문에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각종 역사단체와 시민단체에서 독립선언서와 비슷한 주권선언서를 제창하며 대한민국의 정치적, 경제적 자주 독립을 염원했다.

 

 

3·1 평화주권선언

  100년 전 기미년 '3·1 독립선언'은 무력의 시대에 대한 종언과 도의의 시대를 선포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주권 침탈과 폭정에 맞선 민족의 자존, 자주와 독립, 평등과 평화의 선언이었다.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평창 올림픽의 뜨거운 감동과 남북 단일팀을 향한 나라 안팎의 지지와 성원을 통해 우리는 이 땅의 평화 정착에 대한 의망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군사적 긴장은 좀처럼 누그러질 낌새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휴전 상태에서 한반도 남북에 나뉘어 사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는 절박한 주권이다. 개인의 주권이자 나라의 주권이며, 민족의 주권이다. 강자가 약자를 핍박해 이뤄지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권리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평창 올림픽에서도 확인된 연대와 우정의 힘, 패권과 파괴의 힘을 이기는 평화와 생명의 힘! 그 힘을 이제 우리는 주장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하여 2020년(하계올림픽) 도쿄, 2022년(동계올림픽)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올림픽을 진정한 인류 평화의 제전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 평화가 세계 평화와 직결됨을 다시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다.

  하나,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인 남과 북은 지속적인 대화와 협력으로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효성 있는 방안을 협의해야 한다.

  하나, 미국와 일본은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군사적 행동과 일체의 갈등 조장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하나, 지속 가능한 평화를 향한 주권자드르이 의지를 모으는 주권자 평화회의와 세계 시민들이 힘을 모아 나가는 세계평화회의의 개최를 제안한다.

 

 

 2018년 3월 1일
 3·1 평화주권선언 1차 제안자 갈상돈 포함 643인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주장(매국)하는 대한민국 식민사관 역사학자들과 일부 고위 관료들

 

  "인간 활동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지도에 표시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를 정벌했다고 해서 곧 독도까지 우리 땅이 되었다는 것은 약간의 비약이다."
 

  이 말은 누가 했을까? 글을 읽으며 계속 추측해 보시라.
  일본은 올해도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하면서 중앙정부 하관급 인사가 참석했다. 일본 자위대 국방백서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해서 방위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독도를 일본 땅으로 굳히는 데 여념이 없다. 우리의 영토를 침탈하고 있다. 우리 안에서 친일 세력이 더 득세하고 독도가 우리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여론몰이가 잘 이루어지면 그들은 무력 행사를 계획할지도 모른다.
 
  위 말은 일본 정부안에서 나왔을까? 일본 극우파 학자가 한 말일까? 그런데 다 아니다. 우리나라 학자라는 놈이 한 말이다. 그것도 독도를 지키라고 국민 세음을 무려 47억 원이나 받아간 학자들에게서 나온 말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하일식 교수가 2015년 10월 11일 '미디어오늘'에서 한 말이다. 하일식은 지난 서기 2008년부터 진행되었던 동북아 역사지도집제작에 참여한 인사다. 국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은 하일식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고대사학회 학자들과 한국고고학회 등에 동북아역사지도집 제작을 맡겼다. 그리고 이들에게 47억 원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서기 4세기경까지 경기도 일대를 포함한 한반도 북쪽을 중국 삼국지 위나라 조조가 지배했다고 그려 놨다. 또 독도를 아예 그리지도 않았다. 독도를 그리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관련 전문가들이 무려 8년여에 걸쳐 수많은 토론, 학술회의를 거쳐 만든 지도다. 이것이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 수정 기간을 주었다. 그런데 다시 독도를 그려 오지 않았다.

  당시 동북아역사재단 김호섭 이사장도 "독도는 그려 와야 될 것 아니냐, 최소한 점이라도 찍어 와야지, 이 개새끼들아!"라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이 같은 사실이 2016년 8월 하일식이 속한 강단식민사학계인사와 민족사학계 인사들이 동북아역사재단 주도오 진행한 고대사의 쟁점이 되는 중국 지역을 답사한 때에 터져 나왔다.


  "독도는 우리 것일까? 독도 문제가 되풀이되는 것은 명백한 '진실'을 왜곡하고 독도를 빼앗으려는 일본의 음흉한 음모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또 누가 했을까. 일본 극우파 학자가 한 말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응하라고 만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이 한 말이다. 이 자가 하일식이 참여하여 독도를 그리지 않은 동북아역사지도집 제작 책임자였다. 독도를 지도집에 그리지 않은 것이 실수라고 말한 것이 새빨간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독도 전공자가 아니라 답을 할 수 없다. 일본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우리 것만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 말은 또 누가 한 것일까. 지도집 제작 당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로 있던 김현구 전 고려대 교수가 한 말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와 지도집 제작에 참여한 자들이 한결같이 일본에 유리하게 독도를 팔아먹고 있다. 한술 더 떠 이것을 대한민국 이름으로 발행하여 배포하려다 지난 국회 동북아특위에서 발각되었다. 그리고 지도집은 폐기처분되었고 그처럼 부실한 지도를 만들어 놓고 돈만 처먹은 자들에게 10억 원을 토해 내라고 했다. 이렇게 이 희대의 매국지도집 사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들어서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하일식의 한국고대사학회와 우리나라 고고학을 대표하는 한국고고학회를 중심으로 이 지도제작사업이 유사 학자들의 공격을 받고 좌초되었다고 떠벌였다. 급기야 이 매국 지도사업이 우수 사업이었다며 이를 좌초시킨 세력를 감사해서 처벌해 달라고 감사원에 지난 2018년 2월 8일 감사청구를 했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부임한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이 지도집 제작사업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알고 보니 김도형은 감사청구한 하일식과 같은 연세대 사학과 교수였다.

 
  동북아역사지도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국동북공정사관과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그려져 있다. 다시 지도 제작에 참여하는 자들이 전에 참여했던 자들임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정확하게 일제가 만들어 우리 국사라고 퍼뜨린 <조선반도사>를 표절하고 있다. <조선반도사>에서는 우리 역사를 중국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 특히 낙랑군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역사가 중국 식민지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서기 4세기까지 백제, 신라, 가야는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일제 식민통치는 정당하며, 외세 통치를 받아 온 민족이니 일제가 다시 점령해 보호해 주는 것이 역사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이 <주선반도사>를 하일식 같은 한국고대사학회 등 우리 역사학을 책임지고 있다는 세력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새로 부임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도형이 대놓고 이런 매국지도사업을 다시 수십억 국고를 탕진해서 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알고 보니 현 정권과 밀착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 역사를 담당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및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등 주요 기관장 임명에 결정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 때문이다. 그는 바로 제주도 갑 지역구 더불어민주당 강창일 의원으로 드러났다. 강창일은 문재인 대선후보 선대위 역사바로세우기 위워노히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온 인물이다.

  서울대 국사학과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잇는 본산이다. 이들의 1세대 스승이 이병도다. 이병도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악질 친일 사학자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래서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게 적폐 청산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병도도 청산되지 않았고 오히려 대한민국이 국사학계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후학들이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를 형성하고 있다. 김도형이 한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는데 이 단체 명예회장이 이병도였다. 그리고 역시 조선총독부 친일부역자 신석호도 회장을 역임했다. 한 몸임을 알 수 있다.

  최근 강창일은 한국학연구원원장 안병직과 동북아 역사재단 이사장 김도형 그리고 이낙연 국무총리와 제주도에서 모여 역사바로세우기를 하자고 했다. 이들이 믿는 구석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재 신채호 사관을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며 단재 역사관으로 역사를 바르게 복원하자는 민족사학을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매장은 위해) 매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현충일에 석주 이상룡 선생의 안동 임청각을 복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석주는 저들이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비난하는 민족사학의 거두다. 단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또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해에 청주에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역에 참배를 하고 단재의 정신을 잇겠다고 다짐했다.

 

  문재인 정권이 촛불혁명 덕에 적폐청산을 목표로 들어섰다. 적폐 중의 적폐는 우리 정신을 좀먹고 파괴하는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이다. 문재인 정권은 친일식민사학계의 강고한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정신을 잇겠다고 한 이낙연 총리가 그 단재를 죽인 친일 사학을 돕고 있으니,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단재가 지하에서 피눈물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나! 조선총독부 황국사관 찌꺼기들이 대놓고 매국역사지도집을 다시 만들겠다며 활개치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홍보하는 문재인 정권이 역사를 매국하는 역적들과 한통속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역사를 바로잡지 않고서야 번드르르한 3·1절 기념 행사와 축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글 발췌: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kreahiti.com), 삼태극(국사광복단 cafe.daum.net)

 

(일부 매국 행위를 하는 역사학자들이 과거에 부당 이득을 취한 친일파 후손이 아닌지 조사해 봐야 한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자들이 국가를 더 이상 축내지 못하도록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매국자들은 사정을 두지 않고 모두 처형해야만 반 세기 넘게 비뚤어져 있는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 말로만 선진국 따라 하지 말고, 물건만 선진국 거 수입해서 쓰지 말고 역사를 배우고 따라 하라.)

"삼성 광고 끊긴다고요?"..취재진이 말하는 '우리가 삼성을 쫓는 이유' / SBS / 끝까지 판다 / 더저널리스트 / 이병희 기자 (2018. 3. 24.) 

SBS 뉴스가 '더 저널리스트(THE JOURNALIST)' 시리즈로 시청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번 순서는 에버랜드의 수상한 땅값과 삼성 경영권 승계 의혹을 탐사보도하고 있는 SBS '끝까지 판다' 취재팀의 이병희 기자입니다.

 

■ '삼성 에버랜드의 수상한 땅값' 최초 보도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시점은 설 전이였어요. 제보자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본인이 "용인 지역에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근데 "에버랜드 땅값과 관련해서 조금 이상한 게 있는 것 같고 자기가 일부 토지 정보하고 가격 정보를 갖고 있는데 관심이 있느냐"라고 했어요. 처음에 모든 정보를 주지는 않았고 가격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는 정보만 있었고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사실은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 땅은 단순한 놀이동산이 아니고 우리나라 재벌 기업의 굉장히 중요한 땅인데 지난 오랜 시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왜 땅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을 안해봤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용인을 찾아가서 그 사람을 만났고 자료를 받았어요. 자료를 받고 나서 봤는데 일부 자료를 검색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는 가격이 있는 것 같다'는 건 알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국토교통부가 공시하는 공시지가라는 건 상당히 안정적인 가격이거든요. 왜냐하면 공시지가는 세금을 매길 때 또 부담금을 매길 때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이게 너무 오르락내리락 들쭉날쭉하면 안되는 가격이거든요. 공시지가라는 건 매년 1~2% 안정적으로 오르는 약간 쭉 우상향 곡선을 가격이 맞아요. 그리고 제보한 분도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공시가격이 되게 '폭등하는 가격이 보인다' 그리고 '폭락하는 부분도 있다'라는 이야기를 해서 '아 그 부분은 좀 이상하겠다'라고 해서 만났습니다.

 

 ※ 3월 23일 업로드했던 영상 중간에 편집 오류가 있어서 24일에 수정본으로 재업로드 하게 되었음을 시청자 여러분들께 알려 드립니다.

삼성 에버랜드의 수상한 땅값.. 


탐사보도 '끝까지 판다' 1일차 전체 다시보기 (풀영상) / SBS / 끝까지 판다 (2018. 3. 19.) 

 

지금부터 저희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이재용 부회장은 2심에서 집행 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재판부가 그렇게 판단한 결정적인 근거 가운데 하나는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승계 작업 자체가 없었으니까 권력자에게 청탁할 이유도 없었다는 논리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대법원 판결을 남겨둔 상황에서 SBS 탐사보도팀이 수상한 땅을 발견했습니다. 이 땅은 경기도 용인에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에버랜드와 그 주변에 퍼져 있는데 땅을 다 합치면 여의도의 4배가 조금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저희가 이곳이 수상하다고 이유는 바로 땅값 때문입니다. 땅값이 뚝 떨어진 채 한동안 유지되다가 갑자기 또 이례적으로 껑충 뛰기도 합니다. 그런데 땅값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기에 공교롭게도 삼성의 경영 승계 작업에 있어서 결정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저희는 경영권 승계의 주요 길목에서 용인 땅이 어떻게 활용됐을지 한 달 넘게 면밀히 살펴봤습니다. 먼저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땅의 윤곽을 이병희 기자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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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제1의 테마파크 에버랜드가 위치한 경기도 용인시 포곡읍입니다. 놀이공원과 워터파크, 호암미술관 등 주요 시설을 중심으로 포곡읍의 5개 리에 걸쳐 이건희 회장과 삼성물산 소유의 땅이 넓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SBS는 이 땅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 지역 등기부등본에 오른 실소유자들을 알아봤습니다. 그 결과 2,029필지 1천 2백48만여 ㎡, 약 3백 78만 평의 삼성 관련 토지를 찾아냈습니다. 필지별 지번을 지도에 하나하나 맞추는 이른바 매핑 작업을 거쳐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이건희 회장 개인 소유의 토지는 565개 필지, 6백 31만 ㎡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삼성물산 법인 소유 토지는 1,386개 필지, 5백 88만 ㎡로 47.2%입니다. 나머지 2%가량은 이건희 회장이 친척 등과 공동 소유하고 있는 땅입니다. SBS 탐사보도팀은 이 땅의 공시지가를 확인했습니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국토교통부가 조사해서 공시한 토지의 단위면적당 가격인데 각종 세금과 부담금을 부과할 때 기준으로 쓰는 객관적인 토지 가격입니다. 특이한 점은 에버랜드의 중심부 4백 15만 ㎡, 약 126만 평은 개별 필지들이 하나의 가격으로 묶여 움직였는데 지난 2014년까지 ㎡당 8만 원대의 낮은 가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수도권의 테마파크여서 에버랜드와 자주 비교되는 서울랜드 공시지가는 같은 시기 에버랜드의 5배였고 같은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의 땅값도 에버랜드보다 3만 원 이상 비쌌습니다. 경기도 파주의 하니랜드 공시지가는 20만 5천 원. 경기도 포천의 서운동산도 9만 원으로 에버랜드보다 더 비쌌고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경기도 연천의 한탄강유원지가 에버랜드와 같은 8만 원대였습니다. 


[유선종/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 : 공시지가를 흔히들 관리한다는 표현을 써요. (땅값이) 낮은 상태가 좋은 경우가 일반적이니까 주변과 상관없이 크게 오르지 않도록 이렇게 누르고 있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죠. 기업 보유 부동산들은…] 유원지의 접근성, 인지도, 브랜드 가치 등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에버랜드의 공시지가가 너무 낮다는 지적이 그래서 줄곧 제기돼 왔습니다. '삼성 뒷바라지' 여념 없던 국민연금공단..


탐사보도 '끝까지 판다' 2일차 전체 다시보기 (풀영상) / SBS / 끝까지 판다 (2018. 3. 20.) 

 

지금부터는 저희가 어제(19일) 집중보도해드렸던 삼성의 용인 땅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에버랜드가 있는 삼성 용인 땅은 여의도 4배 크기가 넘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땅 값이 크게 요동치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결정적인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오늘 이 땅의 가격이 갑자기 올랐던 시기를 집중적으로 파헤쳐보겠습니다. 그 시점은 바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논의되던 때입니다. 합병을 앞두고 당시 제일모직이 가지고 있던 용인 땅을 비롯해 부동산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여러 곳에서 평가합니다. 그런데 한 외국 전문 기관은 1천4백억 원으로 계산했는데 국내 한 기관은 3조 2천억 원이라는 평가를 내놓습니다. 그 차이가 20배가 넘습니다. 이런 후한 평가를 내린 곳이 바로 국민연금입니다. 당시 수사를 했던 특검도 이 부분을 들여다본 것으로 확인됐는데, 한 특검팀 관계자는 당연히 공소사실에 포함됐어야 할 사안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정명원 기자의 단독취재로 시작하겠습니다. 삼성 땅값 '폭등' 앞두고 나타난 국토부 공무원..


탐사보도 '끝까지 판다' 3일차 전체 다시보기 (풀영상) / SBS / 끝까지 판다 (2018. 3. 21.) 

 

지금부터는 SBS 탐사보도팀이 준비한 소식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삼성 관련 연속 보도가 나가자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는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21일) 국민연금이 상당히 의미 있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일 있을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기존 삼성물산 이사들의 재선임에 반대하기로 한 겁니다. 이 결정이 뭘 뜻하는 건지 먼저 정명원 기자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SBS더저널리스트-진정한 저널리즘을 꿈꾸는 프로그램, 사회 정의 구현에 목말라하는 시청자들의 갈증을 다소나마 해소해 줄 SBS 야심작,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에헤라디야, 국경일로 정하자! MB 구속일


이명박 구속(영장 집행) 지켜 본 주진우 기자 반응 

 


[현장 영상] '구속' 이명박 전 대통령 동부구치소 수감(2018. 3. 22.) 

 


'구속' 이명박 전 대통령, 동부구치소 도착 입소 절차 진행 후 독거실 수감 예정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 특보 생중계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9회 http://programs.sbs.co.kr/culture/blackhouse/vod/50915/22000268107

<9회 식순>

트럼프의 불안한 정신 상태 

강특보-조현오/김용판 전 경찰청장(경찰청 댓글 공작 지시)->지금 현재 대구시 달서구청장 선거운동 중 

권성동-강원랜드 사법특위, 자한당 간사 장제원이 흙탕물 타기 성공 의혹 

정봉주-프레시안 민국파 간 미투 공방 

(마스터의 공식)중국의 화푸 빌딩 매입 사기 관련 검은 커넥션(파이시티 이정배 대표와 중국 교포 민봉진(김홍영), 우리은행(이팔성))

(MB매뉴얼)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황상민 심리학 박사/최명기 정신과 전문의/이정렬 퇴거불응자

블랙하우스

블랙하우스

(1-1) 유대균 출연 


(1-2) 강경화 출연 


(1-3) 양정철 출연


(2)가상화폐의 정체/국민의당 바른정당 통합 논란 토론/농협 대출 사기 

 http://programs.sbs.co.kr/culture/blackhouse/vod/50915/22000259874



(3)중국 박항서 축구감독 독대/사법 적폐의 수괴(총책임자) 양 씨/트럼프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언 


(4) 안태근 서지현 성추행 은폐 사건/블랙리스트 속 판사들(송,문 판사/이승형 변호사)-양승태 집 방문/작전명 레드펜/네이버 뉴스 재배치 사건-매크로 댓글 달기



(5) 이재용의 탈옥/권성동의 강원랜드/삼성공화국 특혜-이재용 판결문 해부/삼성SDS댓글팀100여개존재-네이버(댓글팀 150여 개) 매크로 여론 조작 증언

[미디어오늘]강유미 '열광' 이전에 짚어야 할 것들

이 블로그 관리자 본인은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한때 '성형 논란'에 휩싸여 정체성을 잃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개그맨 강유미 씨가 기자 역할(강 특보) 역할을 잘해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지금 현재 강 씨는 우려와 달리 재미있게 치열하게 맡은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면서 프로그램의 한 축을 엄연히 끌어가고 있다. 이 방송의 주제들이 다소 칙칙하고 심각한 주제임에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활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 이로써 SBS 블랙하우스 책임 PD의 용병술이 진가를 발휘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네이버상의 블랙하우스 시청률은 3~4%로 나오고 있으나 주요 방송사의 여타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은 실제 시청률과는 동떨어진 조작된 데이터일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 네이버에서 대응하기 전 블랙하우스 방송 시간 중 강유미와 권성동이 실검 1위에 올랐다는 사실 또한 이러한 가설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6회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http://programs.sbs.co.kr/culture/blackhouse/vod/50915/22000265202


7회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http://programs.sbs.co.kr/culture/blackhouse/vod/50915/22000265947


블랙하우스 8회 2018.03.15(목)

http://programs.sbs.co.kr/culture/blackhouse/vod/50915/22000267089

흑터뷰: (질문 특보)강유미, 이명박 전 대통령에 빨간 확성기 외침 “다스는 누구 겁니까”

박지원, 정치 9단의 촌철살인 “MB는 돈 벌려고 대통령 됐기 때문에”/이정렬 전 판사 해설(MB가계도 탐구)

강 특보의 흑터뷰2 - 안 전 충남지사의 미투(성추문)와 기자회견 돌연한 취소

전관예우 차한성 변호사는 누구인가? 이정렬,최강욱 해설

이슈 벙커: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호사카 유지, 김지윤 정치학 박사, 안드레이 란코프(전 김일성대 교수, 러시아인)

주제:세계의 독재자들

사담 후세인, 니콜라예 차우셰스쿠(집권 기간 동안 국민 6만여 명을 처형한 루마니아의 독재자, 시민이 구성한 인민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현장에서 총살), 무아마르 카다피

북한은 개방 없는 개혁 중, 북한식 등소평/박정희/리콴유, 경제성장 연간 최소 5% 상회

그것이 알고싶다 2017 02 12 - 시민의눈(부정선거 감시활동/신비 김상호 출연)

 


파파이스( 2017. 2. 3.)-시민의눈 

 

[시민의 날개]유창렬 집행위원장+[시민의눈]김상호 대표제안자+송병우 플랫폼팀장 "의문의 노트북"


[팩트9뉴스] 영상기획/외침(15.1.2)-팟캐스트 '새가 날아든다' 진행자 신비, 김상호씨의 외침 (2015. 1. 2.)  


새가 날아든다 3/19(월) 1부[민주당의 자신감, 이명박 구속-지방선거-개헌]  


새가 날아든다 3/20(화) 1부[변하고 있는 안철수의 말/윤상 감독 종북논란/MB 구속영장 청구!]  


새가 날아든다 3/21(수) 1부[도우미 홍준표/이시형은 검찰을 응원하고 있다?!/기독계도 뇌물이라고?!]  


새가 날아든다 3/22(목) 2부[구속 앞둔 이명박의 멘탈은?/삼성의 용인 땅값은 누가 움직였을까? With 선대인]

조문기 회고록 1장. 어린 시절-③ <태극기 사건>


  생전 처음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4학년 때의 일이다.

  1937년, 일제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창 전쟁 중이었다.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실은 열차가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 앞을 통과했다. 우리들운 그때마다 역으로 나가 양손에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러야 했다. 교장은 매일 조회시간에 대일본제국이 승승장구하여 세계를 일본의 앞마당으로 만들 것이라고 훈시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도 승전 소식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일본 이야기만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정말 스런 줄로만 알았다. 일본은 우수하고 일본인처럼 되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위대한 일본을 위해서 전쟁에 자원하는 것이 조선인이 해야 할 자랑스러운 선택이라고 연일 떠들었다.


  그런(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책보를 둘러메고 기를 받아 역에 나가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만세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외조부가 안채 마루 끝에 나와 있었다.


"문기야! 그 손에 든 게 뭐냐?"


 손에는 방금 역에서 흔들던 일장기가 들려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 준 국기예요."


나는 철없이 일장기를 흔들어 보였다.


"이놈! 예가 어디라고 망측한 걸 집으로 들이는 게냐!"


외조부의 격노한 얼굴은 성난 호랑이처럼 무서웠고 눈빛에선 불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놀란 나는 어쩌러 줄 몰라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외조부가 쏜살같이 달려와 일장기를 빼앗더니 박박 찍어 바닥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 이놈! 내일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순간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나는 대문을 차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외조부는 내게 자상한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사는 게 안쓰러웠던지 밥을 먹을 때는 겸상을 했고, 고기반찬이며 생선을 가까이 놓아 주셨고 밤마다 곶감이나 약식을 따로 챙겨 주곤 하셨다. 백발이 성성한 분이 손수 잠자리를 봐주며 친손자보다 더욱 각별하게 보살펴 주셨다. 그런 외조부가 돌변해서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그저 거럽고 고깝기만 했다. 한참을 울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눈물이 말라 나오지 않을 때쯤 낮게 있었던 일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무엇이 외조부를 그렇게 화나게 했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유는 알 수 없고 분노가 치밀어 오늘 뿐이었다.


'왜 우리 부모는 나 하나 챙기지 못해 외갓집 신세를 지게 하는 걸까?'

외조부의 깊은 뜻을 알 길 없는 나는 마냥 서럽고 고까워서 부모님을 원망했다. 해가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을 내려오며 나는 결심했다.


'좋다. 더는 외갓집 신세 안 진다. 내일 아침에 걸어서라도 집으로 간다.'

잠자리에 들 시간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느 때 같으면 외조부의 바로 곁 아랫목에서 잠들었겠지만 그날은 문지방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외갓집 신세는 오늘까지다. 날이 새면 집으로 돌아가자. 붙잡아도 돌아보지 않을 거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외조부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잠배를 피워 물었다.


"문기야, 이 할아비가 밉지?"


외조부의 자상한 말씀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구렸다.


"철딱서니 없는 놈, 아무럼(아무러면) 널보고 정말 가라 하겠느냐?"


외조부는 긴 한숨을 연이어 내위었다.


"네가 어려서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얘기를 하는 게 좋은 것 같구나."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지. 무슨 말을 해도 난 날이 밝으면 집으로 갈 거야.'


속이 배배 꼬인 나는 입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다 얘기할 테니 일어나 앉거라."


외조부가 이불을 들추고 나를 일으켜 앉혔다.


"문기야, 이 할아비 말을 잘 듣거라. 네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다 거짓부렁이다. 왜놈들이 거짓을 꾸민 거야."


(그러며)그러면서 외조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들려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외조부는 당신의 목격담을 섞어 가며 비극적인 우리 역사를 어린 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아 주었다."


"일본공사 미우라가 일본에 반대하는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 깡패들을 시켜 궁궐에 침입해 대신들과 궁녀들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칼로 난자했다. 증거를 없애려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1905년, 군대를 동원해 궁으로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황제에게 나라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을사조약에 옥쇄를 찍도록 협박했다. 고종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나라를 팔아먹을 법한 대신들을 구슬렸다. 역적놈들은 자신에게 떨어질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황제의 승인도 받지 않고 나라의 주권을 팔아 버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역적놈들은 한술 더 떠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이라 떠받들었고, 그 대가로 은사금을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은 짐이 승인한 것이 아니라는 친서를 발표한 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세계만방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무력을 앞세운 을사조약을 파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첩자가 있어 비밀이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의 방해 공작 때문에 밀사들은 끝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이준 열사는 회의장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자결하였다."

"고종 황제가 특사를 파견한 것을 꼬투리 잡아 일본은 이완용, 송병준을 앞세워 황제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일제의 무력 앞에서 결국 순종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었다. 순종이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일본 군부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합방 조약을 강행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멸망하였고 이후로 총독부가 들어서고 오직 일본 왕의 지시만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고종 황제가 돌아가시고 왜놈들에게 독살됐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그놈들은 명성황후에 이어 틀림없이 황제도 독살하였을 것이다."


  곰방대를 든 외조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느라 외조부는 이야기 도중 몇 번이나 숨을 돌렸다. 나도 듣다 보니 치가 떨리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의 머릿속에서 세상이 모두 뒤바뀌는(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알겠느냐? 오늘 이 할아비가 일장기를 찢어 버린 이유를 말이다."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날까지는 이 집에 왜놈 기는 못 들인다."


  총독부가 들어서는 날 외조부는 고향으로 내려와 칩거를 시작했다. 초야에 붇혀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고개 너머 추계리가 송병준의 고향이라 한날한시도 이를 안 간 날이 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외조부는 길게 담배 한 모듬을 빨고는 자리에 들었다.


 "늦었다. 자거라."


  불을 끄고 누웠지만 이번에는 왜놈들의 만행에 치가 떨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나마 외조부의 깊은 뜻을 곡해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려 외조부의 뒷보습을 보았다. 외조부의 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넓게 보였다.


 "할아버지, 그럼 조선의 국기는 없는 건가요?"

 "보고 싶으냐?"

 "예, 꼭 보고 싶어요."

 "그전에 이 할아비와 약속하자. 오늘 들었던 얘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왜놈들은 잔인한 놈들이다. 명심하거라."

 "예"


  나는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대답했다.


  "향교가 어디 있는지 알지? 향교 대문에 태극기가 있느니라."


  외조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재차 강조를 했다.


 "문기야, 이 할아비가 네게 큰 짐을 안기는[지우는] 게 아닌가 싶구나. 오늘 얘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거라."


  외조부 승지 이조영(李肈榮). 그분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왜놈들, 역적놈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분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평생을 지배했다.


  날이 밝자 나는 향교로 달려갔다. 이른 새벽이라 인기척이 없었다. 굳게 닫힌 향교 대문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보였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울대를 눌렀다. 눈앞에 신천지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거대한 태극 문양이 열네 살 어린 소년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태극기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교실 앞이었다. 

  

  "너희들, 향교에 안 갈래?"

  "향교는 왜?"

  "거기에 아주 특별한 게 있거든."


  모두들 반장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우르르 따라 나왔다. 향교 앞에 이르러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본 신천지에 대한 얘기를 했다.


  "너희들 우리나라 국기 본 적 있어?"

  "그럼, 매일 보지. 국기는 학교에 있잖아."

  "그건 일장기고 태극기 말이야. 일본 기 말고 우리나라 기 말이야."

  "일장기는 뭐고 태극기는 뭐야?"

  "이게 우리나라 태극기야 절대로 잊으면 안 돼."


  나는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국기를 알려 주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기마저 못 쓰게 한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니 교장의 훈시가 쩌렁쩌렁 교문 밖으로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영락없이 지각생으로 벌을 서야만 했다.


  "이놈들! 떼거지로 어디 가서 놀다 온 거야?"


  주임 선생이 무섭게 다그치자 한 녀석이 겁먹은 얼굴로 실토했다.


  "문기가 태극기 보여 준다고 향교에 다녀오느라 늦었어요."


  주임 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이 순식간에 커졌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고 교장은 나를 퇴학시키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벌을 서는데 손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주재소로 끌려갔다. 그때서야 외조부와의 약속을 어긴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주재로의 순사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어린아이를 싸늘한 철창에 가둘 수는 없었던지 숙직실에 가둬 놓았다. 숙직실에 갇힌 나는 넋을 놓고 나라 잃은 설움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태극기를 보는 게 큰 죄가 되는구나 생각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고함 소리에 눈을 떴다.


  "이놈들아! 우리 외손자 내놔라!"

  "어르신 제 말씀 좀…"

  "시끄럽다, 이놈아! 어디 네 놈 이바구(이야기) 듣자고 예까지 온 줄 아느냐! 당장 우리 외손자 내놔!"


  외조부는 책상을 탕탕 피며 으름장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순사들과 소장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순사 하나가 숙직실로 달려왔다. 주재소 안에서 외조부의 모습은 장군처럼 당당해 보였다.


  "어르신, 학교에서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저희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증서 한 장만 써 주시면 제가 조처해 보겠습니다."


  조선인 순사들은 철없는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봐줄 수 있겠지만 신고를 한 교장을 일본인이다. 일이 커지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다. 외조부도 그 대목에 가서는 순순히 소장을 말을 따랐다. 대쪽같은 성품을 가진 분이었지만 손자의 장래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분노와 치욕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었다. 새벽에 했던 약속만 지켰어도 할아버지에게 이런 치욕을 안겨드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고두고 곱씹으며 맹세했다.


  "이놈들! (훗날) 이날의 치욕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리라."

  1장. 어린 시절-② <외가 생활>

  외가댁은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는 용인 부근의 양지마을이었다. 외가댁에 도착하여 외조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기 전에 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외가댁에 오기 전까지는 막연한 동경으로 들떠 있었지만 막상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자 서글퍼졌다.


  외가댁에는 외조부와 작은 외숙모, 이종 사촌형 둘과 누나, 5살 된 동생이 살고 있었다. 장남인 삼촌은 본처와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외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명절 때만 내려왔다.


  외조부는 고종 31년(1984) 전시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구한말 고종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학자이기도 했다. 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반납하고 향리인 양지 마음로 돌아와 은거하며 독서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지만 큰 벼슬을 했던 분이라 군수나 경찰서장이 새로 부임해 오면 인사를 드리러 찾아오곤 했고, 일년에 한 번 향교에서 제사를 모실 때는 외조부가 주관을 했다.


  다음 날 나는 외조부를 따라 양지보통학교에 갔다. 일본인 교장과 주임 교사는 나의 성적표를 보고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외조부의 기세에 눌려 빠르게 수속을 밟아 주었다.


외가댁과 학교는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다. 다벼락에는 사람이 드나들 만한 개구멍이 있어서 학교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도 수업시간에 늦지 않았고 점심 시간에도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매송보통학교와 달리 양지보통학교는 건물도 컸고 학생 수도 두 배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6년제 보통학교였으며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학교 교실마다 일장기 곂에 낯선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는데, 이 학교를 세운 송병준 백작이라고 했다.


사랑방에서 외조부와 잠을 자게 된 나는 잠자리에서 송병준 백작에 대해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송병준 백작이 누구예요?"

"백작은 무슨 백작! 그놈은 역적놈이야!"

"왜 역적인데요?"

"왜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역적이지."

"나라가 있는데 무슨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그러세요?"

"넌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른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게다."

  그 후 나는 외조부로부터 "송병준 역적놈", "송가 씨알머리들"이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게 들어야 했다.


  양지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오면서 나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성적이 형편없어 전입 당시 눈총을 받던 내가 그해 기말고사에서 우등생이 됐고 다음 해에는 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루바이 김분조'라는 별명이 생겼다. 번역하자면 '조문기 우쭐댄다'는 뜻인데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흑판에 커다랗게 '요루바이 김분조'를 써 놓고 나를 놀렸다. 나는 우쭐대거나 으스대는 따위의 교만과는 거리가 멀었다.천성이 내성적이고 외갓집 신세를 지는 터라 탈잡는 이가 없어도 기가 죽어 있었다. 언제나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으로 시름에 빠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를 그렇게 놀려댄 아이들은 송가 씨알머리들의 자식들이었다. 송백작의 집이 있는 추계리는 송씨들의 집성촌이었는데 이들의 위세가 대단했다. 송가 씨알머리들은 학교에서도 자주 말썽을 부렸지만 일본인 교장조차 송씨들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못하고 덮어주곤 했다. 나의 별명은 '요루바이 김분조'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조문기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칭찬을 했다. 당시는 수업시간에도 일본어로 말할 때였으니 "깃또 모노니 나루"라고 하지만 말을 교묘히 바꾸어 놀렸다. '게모노'는 짐승을 뜻하니, "조문기는 틀림없이 짐승이 된다"고 놀려댄 것이다. 아이들의 놀림으로 나는 더욱 말없는 학생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개구멍을 통해 집으로 왔다. 특히 송가 씨알머리들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외조부의 분노는 무의식적으로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1장. 어린 시절


<내 고향 야목리>

나의 고향은 100여 호의 농가가 모여 사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초가집에서 소작을 부치며 살았지만 우리 집안은 제법 많은 땅을 가진 부자였다.

할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소작으로 주고 첩실을 거느리며 한가롭게 한량으로 살다가 내가 다섯 살 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훤칠한 키에 호남이었던 아버지는 승지 벼슬까지 지낸 집안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나는 그중 차남이다.

장남인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가 대를 잇기 위해 야목리로 돌아왔지만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었고 어린 나에게 야단 한 번 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손님 같은 분이었다. 제사와 명절날에만 집으로 돌아왔다가 제사가 끝나기 무섭게 땅 문서를 챙겨들고 나갔다. 아버지는 무슨 일인가에 열정을 쏟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게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우리 집은 손바닥만 한 밭을 낀 초가집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몰락해 있었다.


더듬어 보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단편적이다. 후레 내가 일본에서 귀국해서 집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장독이 하도 많아 호기심이 생겨 하나씩 열어 보았다. 맨 뒷줄의 큰 장독 안에 책이 몇 권 들어 있었다. 책은 보통 장독에 넣어 보관하지 않는다. 무언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물건이다 싶어 남이 불세라 주위를 살치며 책을 꺼내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붉게 장정을 한 표지에 '조선독립소요사'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총독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조선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이었다. 

  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언젠가 백발이 성성한 외조부님이 나를 곁에 두고 혼잣말처럼 푸념하섰다. 

 "애비 때문에 네가 고생이구나. 되지도 않는 일을 한다고 저렇게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는 뒷전이니…'

  외할아버지는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끝내 그것을 들어 보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던 걸까? 조선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기록을 왜 숨기고 있었던 걸까? 해방 이후 최근까지 아버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기회가 될 때마다 각종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싫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승지 벼슬을 지낸 대쪽같은 성품의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전통교육을 받으며 자란 분이다. 위로 오라버니 하나를 두고 외동딸로 고이 자라 조씨 문중의 며느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온화하고 정갈하신 성품으로 큰살림을 하실 때에도 집안에서 거친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밤이면 호롱불 아래 다소곳이 앉아 바느질을 하거나 편지를 쓰곤 했다. 

  내가 보통학교를 들어갈 무렵 우리는 살던 집에서 나와 방 두 칸과 광이 딸린 초가집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이 간다지만 우리는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저앻야 할 처지로 몰락해 버렸다. 이사한 집은 장마에 흙담이 내려앉아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집에서 어머니는 어린 나와 여동생을 위해 바느질을 하고 이 집 저 집에서 쌀을 꾸고 군불을 지필 솔가지를 장만하고 작은 텃밭을 일구었다. 양갓집 살림 살던 분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변화였지만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큰집 살림을 할 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었던 터라 어려운 처지를 당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너나없이 가난한 살림었지만 작은 정성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던 때다.

  외가에서 학교에 다니던 형은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왔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얌전한 여동생은 한없이 곱게만 보였다.


  한없이 어질고 자애롭게만 보이던 어머니는 심지가  곧고 사려 깊은 분이었다. 후일, 내가 일본에서 막 돌아왔을 때다. 큰 뜻을 품고 거사를 준비하던 중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젊은 혈기에 일을 허술하게 처리했다가는 하루살이로 사라질 수도 있던 때였다. 어머니는 내 표정에서 심란함을 읽으셨는지, 하루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징벙으로 끌려가더구나."

  "…예."

  "뜻을 세웠으면 밀고 나가거라. 떳떳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남자다운 게다."

  너무도 의외였다. 어머니의 말씀에 머리가 맑아졌다. 후에도 삶의 고비가 올 때마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나를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내게 대쪽 같은 의지를 심어 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 마음의 고향 같은 분이다.


  야목리 농가의 9할이 소작농이었다. 자기 땅이 있다고 해도 자급할 능력이 되는 집은 두어 가구에 불과했다. 수원 갑부 양승관이 마음 땅 대부분을 소유했고 마름을 두어 관리했다. 마름 집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창고는 추수 때가 되면 쌀가마니로 그득했다. 마을의 쌀이 모두 그곳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마음 사람들의 생활은 형편없었다. 두어 벌 바지 저고리에 짚신 차림으로 한 해를 나고, 겨울이면 동상으로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먹고사는 일이 빠듯해서 하루 세끼 챙겨먹는 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쌀 두어 줌에 나물을 넣어 밥을 지었다. 나물에 밥이 몇 알 달린 나물밥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쌀을 팔아서 돈을 준비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월사금 20전을 감당하지 못해 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예닐곱 명에 불과했다.

  

  매송면에 있는 매송보통학교는 전교생이 300여 명인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보통학교는 원래 6년제였으나 매송보통학교는 4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다. 교과서는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었고, 음악 시간에는 일본 동요만 불렀다. 매일 아침마다 열리는 조회시간에는 운동장에 열 맞춰 서서 일본인 교장의 잔소리를 들었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솔방울 공출을 하러 나갔다. 오전부터 수업은 제쳐 두고 농가에서 공출해 온 가마니를 끌고 산에 올라가 온 산을 훑었다. 공출이 없는 날은 1인당 솔방울 한 자루씩을 가져와야 했다. 학교생활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붙인 과목은 조선어였다.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글로 대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따로 복슴을 하지 않아도 보는 즉시 머릿속에 들어왔다.


  야목리에서 학교까지는 십여 리 길로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다침에 마을 아이들이 모여 함께 등교했는데, 어머니가 옆집에서 쌀을 꾸어다 아침을 준비하는 날은 여지없이 지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야단 한 번 맞아 본 적 없었는데 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지각대장에 몇 달씩 월사금을 내지 못했으니 매일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회초리를 맞거나 교실 뒤에서 벌을 서며 수업을 들어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학교 가기가 지옥 가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꾀를 냈다. 집에서는 평소처럼 책보를 메고 나와서는 마을 앞 모퉁이를 돌아서면 곧바로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진달래로 따먹고 핅도 캐고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한나절이 금방 지나갔다. 배꼽시계가 요란할 즈음이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면 누가 보아도 하굣길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등산대장! 오늘은 또 산에서 뭐 하고 놀았어?"

  일주일에 3일은 산에서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나를 두고 아이들은 등산대장이라고 불렀다.

  "내일은 조선어 시험인데 학교 올 거지?"

  "응."

  선생님에게 모진 소리를 들어도 조선어 시간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서둘러 학교에 갔다. 그나마 퇴학당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조선어 시간이 일주일에 3일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이었다. 그날도 또래 녀석들과 자치기를 하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두 바가지나 마시고 들어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날은 물로 배를 채우고 일찍 잠드는 것이 상책이었다.

  "문기 들어왔니? 이리 좀 건너오거라."

  방으로 들어서는데 안방에서 어머니가 불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 게 심상치 않았다. 학교에 안 가는 게 들킨 게 아닐까 하여 겁이 났다. 방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소반 위에 약식과 백설기, 곶감 같은 큰집 제사 때나 볼 수 있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왜 이리 늦은 게야? 어서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터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방 안을 살펴보니 여동생이 어머니 다리를 베고 잠들어 있었고 반닫이 옆에는 작은 봇짐이 놓여 있었다.

  "월사금 때문에 학교 다니기 힘들었지? 말 안 해도 다 안다. 이제부터 월사금 걱정 안 해도 된다. 내일 외가댁 으로 가자."

  다음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댁으로 갔다. 가난에 고생하는 시집간 딸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자 나를 데려오라 한 것이었다.

  수원까지 30리 길을 걷는 동안 어머니의 표정을 심란해 보였지만 나는 내내 들떠 있었다. 이제는 월사금 때문에 망신을 당하지도, 끼니때 우물가에서 물배를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저 신나기만 했다. 당시로서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부민관 폭탄 의거) 조문기 선생 회고록



                                                일평생 독립운동에 투신, 광복회/반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16년 작고

 

서문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 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 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게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5년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민족 반역자)들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 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 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

 

엄밀히 말하면 8.15니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

 

매일 일본 황실을 향해 머리를 굽실거리며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치며 민족 구성원을 전쟁터로 내몰던 일제 관리들이 해방 후에 이 나라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식민지 민족말살교육의 첨병이었던 훈도들이 모조리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 일선 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민족을 배신하는 데 앞장섰던 성직자들은 여전히 존경받는 성직 지도자로 군림했다. 민족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고등계 형사들과 순사들이 모조리 국립 경찰의 간부가 되어 항일운동 세력을 낱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 경찰들의 손에 다시금 구금되어야만 했다. 항일 운동가들을 토벌하던 황군 장교들은 해발 후 빨갱이를 쳐부수는 국군 장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쿠데타로 군사 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이 땅 주류 세력의 뿌리가 친일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이 나라는 친일파들의 낙원이라 부를(불릴) 만하다. 친일파들의 철옹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실례를 보자.

 

지금 전국에서 친일파들의 동상, 공적비, 기념비, 송덕비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키워 놓은 후계 세력들은 친일파들을 본받고 따르라고 각종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60년을 공들여 쌓아 놓은 굳건한 친일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집권 세력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 보려고 칼을 빼들었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가로막는 친일 세력의 벽에 부딪쳐서 절절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친일파가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한 나라참으로 하늘이 무섭고 역사가 두렵고 선열들의 호통소리가 들리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 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3년 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이란 책에서 조문기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좌나 우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알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명성이란 것은 당초에 없었으니 그 말만 뺀다면 정곡을 찌른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내게는 이념도 사상도 조직도 없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상태로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독불장군에다 좌충우돌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 지난 세월도 꽤나 거칠고 험난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밍더지지 낳을 만큼 끔찍한 역경도 많이 체험했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다 보니 철부지의 치기, 영웅심에다 큰 목표에 대한 사명감이 맞물리면서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탓일 게다. 나이 80이 된 오늘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대로 산다. 그 실을 지켜 온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지난날에 (대한) 후회는 없다.

 

서툰 내 글솜씨가 이런 내 진솔한 민족애를 얼마나 담아낼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의 대부분이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 보니 행여 역사 한구석이라도 더럽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이 책을 내가 민족에세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라 생가갛고 역사의 한구석에 조용히 세워 놓고 민족의 품속에 안겨 눈감고 싶다.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지적 재산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DAUM>

 

다음이 원래 이렇게 통제가 심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언제부터 이랬는지 더듬어 돌아보니 카카오와 다음에 병합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나는 내가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을 때 해커가 들어와서 HTML 코드에 릴 도박 사이트 연결 소스를 삽입

 

 <!DOCTYPE html PUBLIC "-//W3C//DTD XHTML 1.0 Transitional//EN" "http://www.w3.org/TR/xhtml1/DTD/xhtml1-transitional.dtd">
<html xmlns="http://www.w3.org/1999/xhtml">

하면서 제재 조치를 당하게 되었고 지금 현재 나의 잘못도 아닌 사유에 의해서 블로그 페이지가 삭제되고 계정은 사용 제한이 걸리게 되었다. ㅠㅠ;;

 

망할 w3 사이트와 망할 해커 같으니라고~내가 눈 감는 순간까지 너희들을 저주하리라~

(이 망할 사이트는 들어가면 악성 코드 감염될 것 같아 차마 들어가지 못하겠다. 똥 밟기 싫어!)

 

다음이 정책이라고 주장하며 마구 휘두르며 저지르는 지적 재산권 침해, 심각한 수준이다. 상식적인 인터넷 사용자라면 이들이 주장하는 정책이 얼마나 폭압적이며 터무니없는지 동감할 것이다.

다음 블로그나 티스토리에 올리는 동영상 및 사진은 다음TV팟과 자동의 연동이 되며 올리는 순간 위와 같은 제약을 받게 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사례를 찾아보니 굉장히 많았다. 아래는 다른 사람들이 다음 측에서 당하고 기분 나쁘고 억울하다고 올려 놓은 글들이다.

 

 

이런 이상한 조치들, 아직 끝장나지 않은 현 정권(닭머리와 황굴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수호하는 이념(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 실종된 나라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다음은 지금의 억압적 정책을 개선하라, 그렇지 않으면 곧 이용자들의 외면으로 사운이 기울 것이다. 카카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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