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린 시절-② <외가 생활>

  외가댁은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는 용인 부근의 양지마을이었다. 외가댁에 도착하여 외조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기 전에 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외가댁에 오기 전까지는 막연한 동경으로 들떠 있었지만 막상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자 서글퍼졌다.


  외가댁에는 외조부와 작은 외숙모, 이종 사촌형 둘과 누나, 5살 된 동생이 살고 있었다. 장남인 삼촌은 본처와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외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명절 때만 내려왔다.


  외조부는 고종 31년(1984) 전시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구한말 고종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학자이기도 했다. 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반납하고 향리인 양지 마음로 돌아와 은거하며 독서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지만 큰 벼슬을 했던 분이라 군수나 경찰서장이 새로 부임해 오면 인사를 드리러 찾아오곤 했고, 일년에 한 번 향교에서 제사를 모실 때는 외조부가 주관을 했다.


  다음 날 나는 외조부를 따라 양지보통학교에 갔다. 일본인 교장과 주임 교사는 나의 성적표를 보고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외조부의 기세에 눌려 빠르게 수속을 밟아 주었다.


외가댁과 학교는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다. 다벼락에는 사람이 드나들 만한 개구멍이 있어서 학교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도 수업시간에 늦지 않았고 점심 시간에도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매송보통학교와 달리 양지보통학교는 건물도 컸고 학생 수도 두 배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6년제 보통학교였으며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학교 교실마다 일장기 곂에 낯선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는데, 이 학교를 세운 송병준 백작이라고 했다.


사랑방에서 외조부와 잠을 자게 된 나는 잠자리에서 송병준 백작에 대해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송병준 백작이 누구예요?"

"백작은 무슨 백작! 그놈은 역적놈이야!"

"왜 역적인데요?"

"왜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역적이지."

"나라가 있는데 무슨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그러세요?"

"넌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른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게다."

  그 후 나는 외조부로부터 "송병준 역적놈", "송가 씨알머리들"이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게 들어야 했다.


  양지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오면서 나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성적이 형편없어 전입 당시 눈총을 받던 내가 그해 기말고사에서 우등생이 됐고 다음 해에는 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루바이 김분조'라는 별명이 생겼다. 번역하자면 '조문기 우쭐댄다'는 뜻인데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흑판에 커다랗게 '요루바이 김분조'를 써 놓고 나를 놀렸다. 나는 우쭐대거나 으스대는 따위의 교만과는 거리가 멀었다.천성이 내성적이고 외갓집 신세를 지는 터라 탈잡는 이가 없어도 기가 죽어 있었다. 언제나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으로 시름에 빠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를 그렇게 놀려댄 아이들은 송가 씨알머리들의 자식들이었다. 송백작의 집이 있는 추계리는 송씨들의 집성촌이었는데 이들의 위세가 대단했다. 송가 씨알머리들은 학교에서도 자주 말썽을 부렸지만 일본인 교장조차 송씨들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못하고 덮어주곤 했다. 나의 별명은 '요루바이 김분조'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조문기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칭찬을 했다. 당시는 수업시간에도 일본어로 말할 때였으니 "깃또 모노니 나루"라고 하지만 말을 교묘히 바꾸어 놀렸다. '게모노'는 짐승을 뜻하니, "조문기는 틀림없이 짐승이 된다"고 놀려댄 것이다. 아이들의 놀림으로 나는 더욱 말없는 학생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개구멍을 통해 집으로 왔다. 특히 송가 씨알머리들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외조부의 분노는 무의식적으로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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