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기 회고록 1장. 어린 시절-③ <태극기 사건>


  생전 처음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4학년 때의 일이다.

  1937년, 일제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창 전쟁 중이었다.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실은 열차가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 앞을 통과했다. 우리들운 그때마다 역으로 나가 양손에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러야 했다. 교장은 매일 조회시간에 대일본제국이 승승장구하여 세계를 일본의 앞마당으로 만들 것이라고 훈시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도 승전 소식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일본 이야기만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정말 스런 줄로만 알았다. 일본은 우수하고 일본인처럼 되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위대한 일본을 위해서 전쟁에 자원하는 것이 조선인이 해야 할 자랑스러운 선택이라고 연일 떠들었다.


  그런(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책보를 둘러메고 기를 받아 역에 나가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만세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외조부가 안채 마루 끝에 나와 있었다.


"문기야! 그 손에 든 게 뭐냐?"


 손에는 방금 역에서 흔들던 일장기가 들려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 준 국기예요."


나는 철없이 일장기를 흔들어 보였다.


"이놈! 예가 어디라고 망측한 걸 집으로 들이는 게냐!"


외조부의 격노한 얼굴은 성난 호랑이처럼 무서웠고 눈빛에선 불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놀란 나는 어쩌러 줄 몰라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외조부가 쏜살같이 달려와 일장기를 빼앗더니 박박 찍어 바닥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 이놈! 내일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순간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나는 대문을 차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외조부는 내게 자상한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사는 게 안쓰러웠던지 밥을 먹을 때는 겸상을 했고, 고기반찬이며 생선을 가까이 놓아 주셨고 밤마다 곶감이나 약식을 따로 챙겨 주곤 하셨다. 백발이 성성한 분이 손수 잠자리를 봐주며 친손자보다 더욱 각별하게 보살펴 주셨다. 그런 외조부가 돌변해서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그저 거럽고 고깝기만 했다. 한참을 울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눈물이 말라 나오지 않을 때쯤 낮게 있었던 일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무엇이 외조부를 그렇게 화나게 했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유는 알 수 없고 분노가 치밀어 오늘 뿐이었다.


'왜 우리 부모는 나 하나 챙기지 못해 외갓집 신세를 지게 하는 걸까?'

외조부의 깊은 뜻을 알 길 없는 나는 마냥 서럽고 고까워서 부모님을 원망했다. 해가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을 내려오며 나는 결심했다.


'좋다. 더는 외갓집 신세 안 진다. 내일 아침에 걸어서라도 집으로 간다.'

잠자리에 들 시간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느 때 같으면 외조부의 바로 곁 아랫목에서 잠들었겠지만 그날은 문지방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외갓집 신세는 오늘까지다. 날이 새면 집으로 돌아가자. 붙잡아도 돌아보지 않을 거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외조부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잠배를 피워 물었다.


"문기야, 이 할아비가 밉지?"


외조부의 자상한 말씀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구렸다.


"철딱서니 없는 놈, 아무럼(아무러면) 널보고 정말 가라 하겠느냐?"


외조부는 긴 한숨을 연이어 내위었다.


"네가 어려서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얘기를 하는 게 좋은 것 같구나."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지. 무슨 말을 해도 난 날이 밝으면 집으로 갈 거야.'


속이 배배 꼬인 나는 입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다 얘기할 테니 일어나 앉거라."


외조부가 이불을 들추고 나를 일으켜 앉혔다.


"문기야, 이 할아비 말을 잘 듣거라. 네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다 거짓부렁이다. 왜놈들이 거짓을 꾸민 거야."


(그러며)그러면서 외조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들려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외조부는 당신의 목격담을 섞어 가며 비극적인 우리 역사를 어린 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아 주었다."


"일본공사 미우라가 일본에 반대하는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 깡패들을 시켜 궁궐에 침입해 대신들과 궁녀들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칼로 난자했다. 증거를 없애려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1905년, 군대를 동원해 궁으로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황제에게 나라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을사조약에 옥쇄를 찍도록 협박했다. 고종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나라를 팔아먹을 법한 대신들을 구슬렸다. 역적놈들은 자신에게 떨어질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황제의 승인도 받지 않고 나라의 주권을 팔아 버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역적놈들은 한술 더 떠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이라 떠받들었고, 그 대가로 은사금을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은 짐이 승인한 것이 아니라는 친서를 발표한 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세계만방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무력을 앞세운 을사조약을 파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첩자가 있어 비밀이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의 방해 공작 때문에 밀사들은 끝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이준 열사는 회의장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자결하였다."

"고종 황제가 특사를 파견한 것을 꼬투리 잡아 일본은 이완용, 송병준을 앞세워 황제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일제의 무력 앞에서 결국 순종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었다. 순종이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일본 군부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합방 조약을 강행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멸망하였고 이후로 총독부가 들어서고 오직 일본 왕의 지시만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고종 황제가 돌아가시고 왜놈들에게 독살됐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그놈들은 명성황후에 이어 틀림없이 황제도 독살하였을 것이다."


  곰방대를 든 외조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느라 외조부는 이야기 도중 몇 번이나 숨을 돌렸다. 나도 듣다 보니 치가 떨리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의 머릿속에서 세상이 모두 뒤바뀌는(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알겠느냐? 오늘 이 할아비가 일장기를 찢어 버린 이유를 말이다."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날까지는 이 집에 왜놈 기는 못 들인다."


  총독부가 들어서는 날 외조부는 고향으로 내려와 칩거를 시작했다. 초야에 붇혀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고개 너머 추계리가 송병준의 고향이라 한날한시도 이를 안 간 날이 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외조부는 길게 담배 한 모듬을 빨고는 자리에 들었다.


 "늦었다. 자거라."


  불을 끄고 누웠지만 이번에는 왜놈들의 만행에 치가 떨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나마 외조부의 깊은 뜻을 곡해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려 외조부의 뒷보습을 보았다. 외조부의 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넓게 보였다.


 "할아버지, 그럼 조선의 국기는 없는 건가요?"

 "보고 싶으냐?"

 "예, 꼭 보고 싶어요."

 "그전에 이 할아비와 약속하자. 오늘 들었던 얘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왜놈들은 잔인한 놈들이다. 명심하거라."

 "예"


  나는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대답했다.


  "향교가 어디 있는지 알지? 향교 대문에 태극기가 있느니라."


  외조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재차 강조를 했다.


 "문기야, 이 할아비가 네게 큰 짐을 안기는[지우는] 게 아닌가 싶구나. 오늘 얘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거라."


  외조부 승지 이조영(李肈榮). 그분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왜놈들, 역적놈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분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평생을 지배했다.


  날이 밝자 나는 향교로 달려갔다. 이른 새벽이라 인기척이 없었다. 굳게 닫힌 향교 대문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보였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울대를 눌렀다. 눈앞에 신천지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거대한 태극 문양이 열네 살 어린 소년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태극기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교실 앞이었다. 

  

  "너희들, 향교에 안 갈래?"

  "향교는 왜?"

  "거기에 아주 특별한 게 있거든."


  모두들 반장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우르르 따라 나왔다. 향교 앞에 이르러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본 신천지에 대한 얘기를 했다.


  "너희들 우리나라 국기 본 적 있어?"

  "그럼, 매일 보지. 국기는 학교에 있잖아."

  "그건 일장기고 태극기 말이야. 일본 기 말고 우리나라 기 말이야."

  "일장기는 뭐고 태극기는 뭐야?"

  "이게 우리나라 태극기야 절대로 잊으면 안 돼."


  나는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국기를 알려 주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기마저 못 쓰게 한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니 교장의 훈시가 쩌렁쩌렁 교문 밖으로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영락없이 지각생으로 벌을 서야만 했다.


  "이놈들! 떼거지로 어디 가서 놀다 온 거야?"


  주임 선생이 무섭게 다그치자 한 녀석이 겁먹은 얼굴로 실토했다.


  "문기가 태극기 보여 준다고 향교에 다녀오느라 늦었어요."


  주임 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이 순식간에 커졌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고 교장은 나를 퇴학시키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벌을 서는데 손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주재소로 끌려갔다. 그때서야 외조부와의 약속을 어긴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주재로의 순사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어린아이를 싸늘한 철창에 가둘 수는 없었던지 숙직실에 가둬 놓았다. 숙직실에 갇힌 나는 넋을 놓고 나라 잃은 설움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태극기를 보는 게 큰 죄가 되는구나 생각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고함 소리에 눈을 떴다.


  "이놈들아! 우리 외손자 내놔라!"

  "어르신 제 말씀 좀…"

  "시끄럽다, 이놈아! 어디 네 놈 이바구(이야기) 듣자고 예까지 온 줄 아느냐! 당장 우리 외손자 내놔!"


  외조부는 책상을 탕탕 피며 으름장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순사들과 소장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순사 하나가 숙직실로 달려왔다. 주재소 안에서 외조부의 모습은 장군처럼 당당해 보였다.


  "어르신, 학교에서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저희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증서 한 장만 써 주시면 제가 조처해 보겠습니다."


  조선인 순사들은 철없는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봐줄 수 있겠지만 신고를 한 교장을 일본인이다. 일이 커지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다. 외조부도 그 대목에 가서는 순순히 소장을 말을 따랐다. 대쪽같은 성품을 가진 분이었지만 손자의 장래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분노와 치욕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었다. 새벽에 했던 약속만 지켰어도 할아버지에게 이런 치욕을 안겨드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고두고 곱씹으며 맹세했다.


  "이놈들! (훗날) 이날의 치욕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리라."

  1장. 어린 시절-② <외가 생활>

  외가댁은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는 용인 부근의 양지마을이었다. 외가댁에 도착하여 외조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기 전에 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외가댁에 오기 전까지는 막연한 동경으로 들떠 있었지만 막상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자 서글퍼졌다.


  외가댁에는 외조부와 작은 외숙모, 이종 사촌형 둘과 누나, 5살 된 동생이 살고 있었다. 장남인 삼촌은 본처와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외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명절 때만 내려왔다.


  외조부는 고종 31년(1984) 전시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구한말 고종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학자이기도 했다. 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반납하고 향리인 양지 마음로 돌아와 은거하며 독서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지만 큰 벼슬을 했던 분이라 군수나 경찰서장이 새로 부임해 오면 인사를 드리러 찾아오곤 했고, 일년에 한 번 향교에서 제사를 모실 때는 외조부가 주관을 했다.


  다음 날 나는 외조부를 따라 양지보통학교에 갔다. 일본인 교장과 주임 교사는 나의 성적표를 보고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외조부의 기세에 눌려 빠르게 수속을 밟아 주었다.


외가댁과 학교는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다. 다벼락에는 사람이 드나들 만한 개구멍이 있어서 학교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도 수업시간에 늦지 않았고 점심 시간에도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매송보통학교와 달리 양지보통학교는 건물도 컸고 학생 수도 두 배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6년제 보통학교였으며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학교 교실마다 일장기 곂에 낯선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는데, 이 학교를 세운 송병준 백작이라고 했다.


사랑방에서 외조부와 잠을 자게 된 나는 잠자리에서 송병준 백작에 대해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송병준 백작이 누구예요?"

"백작은 무슨 백작! 그놈은 역적놈이야!"

"왜 역적인데요?"

"왜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역적이지."

"나라가 있는데 무슨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그러세요?"

"넌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른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게다."

  그 후 나는 외조부로부터 "송병준 역적놈", "송가 씨알머리들"이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게 들어야 했다.


  양지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오면서 나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성적이 형편없어 전입 당시 눈총을 받던 내가 그해 기말고사에서 우등생이 됐고 다음 해에는 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루바이 김분조'라는 별명이 생겼다. 번역하자면 '조문기 우쭐댄다'는 뜻인데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흑판에 커다랗게 '요루바이 김분조'를 써 놓고 나를 놀렸다. 나는 우쭐대거나 으스대는 따위의 교만과는 거리가 멀었다.천성이 내성적이고 외갓집 신세를 지는 터라 탈잡는 이가 없어도 기가 죽어 있었다. 언제나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으로 시름에 빠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를 그렇게 놀려댄 아이들은 송가 씨알머리들의 자식들이었다. 송백작의 집이 있는 추계리는 송씨들의 집성촌이었는데 이들의 위세가 대단했다. 송가 씨알머리들은 학교에서도 자주 말썽을 부렸지만 일본인 교장조차 송씨들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못하고 덮어주곤 했다. 나의 별명은 '요루바이 김분조'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조문기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칭찬을 했다. 당시는 수업시간에도 일본어로 말할 때였으니 "깃또 모노니 나루"라고 하지만 말을 교묘히 바꾸어 놀렸다. '게모노'는 짐승을 뜻하니, "조문기는 틀림없이 짐승이 된다"고 놀려댄 것이다. 아이들의 놀림으로 나는 더욱 말없는 학생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개구멍을 통해 집으로 왔다. 특히 송가 씨알머리들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외조부의 분노는 무의식적으로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1장. 어린 시절


<내 고향 야목리>

나의 고향은 100여 호의 농가가 모여 사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초가집에서 소작을 부치며 살았지만 우리 집안은 제법 많은 땅을 가진 부자였다.

할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소작으로 주고 첩실을 거느리며 한가롭게 한량으로 살다가 내가 다섯 살 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훤칠한 키에 호남이었던 아버지는 승지 벼슬까지 지낸 집안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나는 그중 차남이다.

장남인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가 대를 잇기 위해 야목리로 돌아왔지만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었고 어린 나에게 야단 한 번 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손님 같은 분이었다. 제사와 명절날에만 집으로 돌아왔다가 제사가 끝나기 무섭게 땅 문서를 챙겨들고 나갔다. 아버지는 무슨 일인가에 열정을 쏟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게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우리 집은 손바닥만 한 밭을 낀 초가집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몰락해 있었다.


더듬어 보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단편적이다. 후레 내가 일본에서 귀국해서 집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장독이 하도 많아 호기심이 생겨 하나씩 열어 보았다. 맨 뒷줄의 큰 장독 안에 책이 몇 권 들어 있었다. 책은 보통 장독에 넣어 보관하지 않는다. 무언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물건이다 싶어 남이 불세라 주위를 살치며 책을 꺼내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붉게 장정을 한 표지에 '조선독립소요사'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총독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조선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이었다. 

  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언젠가 백발이 성성한 외조부님이 나를 곁에 두고 혼잣말처럼 푸념하섰다. 

 "애비 때문에 네가 고생이구나. 되지도 않는 일을 한다고 저렇게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는 뒷전이니…'

  외할아버지는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끝내 그것을 들어 보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던 걸까? 조선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기록을 왜 숨기고 있었던 걸까? 해방 이후 최근까지 아버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기회가 될 때마다 각종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싫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승지 벼슬을 지낸 대쪽같은 성품의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전통교육을 받으며 자란 분이다. 위로 오라버니 하나를 두고 외동딸로 고이 자라 조씨 문중의 며느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온화하고 정갈하신 성품으로 큰살림을 하실 때에도 집안에서 거친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밤이면 호롱불 아래 다소곳이 앉아 바느질을 하거나 편지를 쓰곤 했다. 

  내가 보통학교를 들어갈 무렵 우리는 살던 집에서 나와 방 두 칸과 광이 딸린 초가집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이 간다지만 우리는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저앻야 할 처지로 몰락해 버렸다. 이사한 집은 장마에 흙담이 내려앉아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집에서 어머니는 어린 나와 여동생을 위해 바느질을 하고 이 집 저 집에서 쌀을 꾸고 군불을 지필 솔가지를 장만하고 작은 텃밭을 일구었다. 양갓집 살림 살던 분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변화였지만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큰집 살림을 할 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었던 터라 어려운 처지를 당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너나없이 가난한 살림었지만 작은 정성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던 때다.

  외가에서 학교에 다니던 형은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왔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얌전한 여동생은 한없이 곱게만 보였다.


  한없이 어질고 자애롭게만 보이던 어머니는 심지가  곧고 사려 깊은 분이었다. 후일, 내가 일본에서 막 돌아왔을 때다. 큰 뜻을 품고 거사를 준비하던 중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젊은 혈기에 일을 허술하게 처리했다가는 하루살이로 사라질 수도 있던 때였다. 어머니는 내 표정에서 심란함을 읽으셨는지, 하루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징벙으로 끌려가더구나."

  "…예."

  "뜻을 세웠으면 밀고 나가거라. 떳떳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남자다운 게다."

  너무도 의외였다. 어머니의 말씀에 머리가 맑아졌다. 후에도 삶의 고비가 올 때마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나를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내게 대쪽 같은 의지를 심어 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 마음의 고향 같은 분이다.


  야목리 농가의 9할이 소작농이었다. 자기 땅이 있다고 해도 자급할 능력이 되는 집은 두어 가구에 불과했다. 수원 갑부 양승관이 마음 땅 대부분을 소유했고 마름을 두어 관리했다. 마름 집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창고는 추수 때가 되면 쌀가마니로 그득했다. 마을의 쌀이 모두 그곳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마음 사람들의 생활은 형편없었다. 두어 벌 바지 저고리에 짚신 차림으로 한 해를 나고, 겨울이면 동상으로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먹고사는 일이 빠듯해서 하루 세끼 챙겨먹는 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쌀 두어 줌에 나물을 넣어 밥을 지었다. 나물에 밥이 몇 알 달린 나물밥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쌀을 팔아서 돈을 준비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월사금 20전을 감당하지 못해 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예닐곱 명에 불과했다.

  

  매송면에 있는 매송보통학교는 전교생이 300여 명인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보통학교는 원래 6년제였으나 매송보통학교는 4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다. 교과서는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었고, 음악 시간에는 일본 동요만 불렀다. 매일 아침마다 열리는 조회시간에는 운동장에 열 맞춰 서서 일본인 교장의 잔소리를 들었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솔방울 공출을 하러 나갔다. 오전부터 수업은 제쳐 두고 농가에서 공출해 온 가마니를 끌고 산에 올라가 온 산을 훑었다. 공출이 없는 날은 1인당 솔방울 한 자루씩을 가져와야 했다. 학교생활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붙인 과목은 조선어였다.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글로 대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따로 복슴을 하지 않아도 보는 즉시 머릿속에 들어왔다.


  야목리에서 학교까지는 십여 리 길로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다침에 마을 아이들이 모여 함께 등교했는데, 어머니가 옆집에서 쌀을 꾸어다 아침을 준비하는 날은 여지없이 지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야단 한 번 맞아 본 적 없었는데 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지각대장에 몇 달씩 월사금을 내지 못했으니 매일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회초리를 맞거나 교실 뒤에서 벌을 서며 수업을 들어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학교 가기가 지옥 가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꾀를 냈다. 집에서는 평소처럼 책보를 메고 나와서는 마을 앞 모퉁이를 돌아서면 곧바로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진달래로 따먹고 핅도 캐고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한나절이 금방 지나갔다. 배꼽시계가 요란할 즈음이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면 누가 보아도 하굣길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등산대장! 오늘은 또 산에서 뭐 하고 놀았어?"

  일주일에 3일은 산에서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나를 두고 아이들은 등산대장이라고 불렀다.

  "내일은 조선어 시험인데 학교 올 거지?"

  "응."

  선생님에게 모진 소리를 들어도 조선어 시간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서둘러 학교에 갔다. 그나마 퇴학당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조선어 시간이 일주일에 3일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이었다. 그날도 또래 녀석들과 자치기를 하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두 바가지나 마시고 들어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날은 물로 배를 채우고 일찍 잠드는 것이 상책이었다.

  "문기 들어왔니? 이리 좀 건너오거라."

  방으로 들어서는데 안방에서 어머니가 불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 게 심상치 않았다. 학교에 안 가는 게 들킨 게 아닐까 하여 겁이 났다. 방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소반 위에 약식과 백설기, 곶감 같은 큰집 제사 때나 볼 수 있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왜 이리 늦은 게야? 어서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터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방 안을 살펴보니 여동생이 어머니 다리를 베고 잠들어 있었고 반닫이 옆에는 작은 봇짐이 놓여 있었다.

  "월사금 때문에 학교 다니기 힘들었지? 말 안 해도 다 안다. 이제부터 월사금 걱정 안 해도 된다. 내일 외가댁 으로 가자."

  다음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댁으로 갔다. 가난에 고생하는 시집간 딸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자 나를 데려오라 한 것이었다.

  수원까지 30리 길을 걷는 동안 어머니의 표정을 심란해 보였지만 나는 내내 들떠 있었다. 이제는 월사금 때문에 망신을 당하지도, 끼니때 우물가에서 물배를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저 신나기만 했다. 당시로서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부민관 폭탄 의거) 조문기 선생 회고록



                                                일평생 독립운동에 투신, 광복회/반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16년 작고

 

서문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 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 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게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5년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민족 반역자)들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 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 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

 

엄밀히 말하면 8.15니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

 

매일 일본 황실을 향해 머리를 굽실거리며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치며 민족 구성원을 전쟁터로 내몰던 일제 관리들이 해방 후에 이 나라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식민지 민족말살교육의 첨병이었던 훈도들이 모조리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 일선 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민족을 배신하는 데 앞장섰던 성직자들은 여전히 존경받는 성직 지도자로 군림했다. 민족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고등계 형사들과 순사들이 모조리 국립 경찰의 간부가 되어 항일운동 세력을 낱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 경찰들의 손에 다시금 구금되어야만 했다. 항일 운동가들을 토벌하던 황군 장교들은 해발 후 빨갱이를 쳐부수는 국군 장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쿠데타로 군사 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이 땅 주류 세력의 뿌리가 친일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이 나라는 친일파들의 낙원이라 부를(불릴) 만하다. 친일파들의 철옹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실례를 보자.

 

지금 전국에서 친일파들의 동상, 공적비, 기념비, 송덕비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키워 놓은 후계 세력들은 친일파들을 본받고 따르라고 각종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60년을 공들여 쌓아 놓은 굳건한 친일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집권 세력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 보려고 칼을 빼들었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가로막는 친일 세력의 벽에 부딪쳐서 절절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친일파가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한 나라참으로 하늘이 무섭고 역사가 두렵고 선열들의 호통소리가 들리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 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3년 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이란 책에서 조문기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좌나 우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알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명성이란 것은 당초에 없었으니 그 말만 뺀다면 정곡을 찌른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내게는 이념도 사상도 조직도 없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상태로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독불장군에다 좌충우돌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 지난 세월도 꽤나 거칠고 험난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밍더지지 낳을 만큼 끔찍한 역경도 많이 체험했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다 보니 철부지의 치기, 영웅심에다 큰 목표에 대한 사명감이 맞물리면서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탓일 게다. 나이 80이 된 오늘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대로 산다. 그 실을 지켜 온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지난날에 (대한) 후회는 없다.

 

서툰 내 글솜씨가 이런 내 진솔한 민족애를 얼마나 담아낼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의 대부분이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 보니 행여 역사 한구석이라도 더럽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이 책을 내가 민족에세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라 생가갛고 역사의 한구석에 조용히 세워 놓고 민족의 품속에 안겨 눈감고 싶다.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지적 재산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DAUM>

 

다음이 원래 이렇게 통제가 심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언제부터 이랬는지 더듬어 돌아보니 카카오와 다음에 병합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나는 내가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을 때 해커가 들어와서 HTML 코드에 릴 도박 사이트 연결 소스를 삽입

 

 <!DOCTYPE html PUBLIC "-//W3C//DTD XHTML 1.0 Transitional//EN" "http://www.w3.org/TR/xhtml1/DTD/xhtml1-transitional.dtd">
<html xmlns="http://www.w3.org/1999/xhtml">

하면서 제재 조치를 당하게 되었고 지금 현재 나의 잘못도 아닌 사유에 의해서 블로그 페이지가 삭제되고 계정은 사용 제한이 걸리게 되었다. ㅠㅠ;;

 

망할 w3 사이트와 망할 해커 같으니라고~내가 눈 감는 순간까지 너희들을 저주하리라~

(이 망할 사이트는 들어가면 악성 코드 감염될 것 같아 차마 들어가지 못하겠다. 똥 밟기 싫어!)

 

다음이 정책이라고 주장하며 마구 휘두르며 저지르는 지적 재산권 침해, 심각한 수준이다. 상식적인 인터넷 사용자라면 이들이 주장하는 정책이 얼마나 폭압적이며 터무니없는지 동감할 것이다.

다음 블로그나 티스토리에 올리는 동영상 및 사진은 다음TV팟과 자동의 연동이 되며 올리는 순간 위와 같은 제약을 받게 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사례를 찾아보니 굉장히 많았다. 아래는 다른 사람들이 다음 측에서 당하고 기분 나쁘고 억울하다고 올려 놓은 글들이다.

 

 

이런 이상한 조치들, 아직 끝장나지 않은 현 정권(닭머리와 황굴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수호하는 이념(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 실종된 나라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다음은 지금의 억압적 정책을 개선하라, 그렇지 않으면 곧 이용자들의 외면으로 사운이 기울 것이다. 카카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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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Untitled Documen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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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language="JavaScript1.2">

 var no = 20 ;

 var speed = 13 ;

 var snowflake = "http://www.happyscript.net/testimage/heart.gif";

 

 var ns4up = (document.layers) ? 1 : 0; 

 var ie4up = (document.all) ? 1 : 0;

 var dx, xp, yp;   

 var am, stx, sty; 

 var i, doc_width = 600, doc_height = 400;

  if (ns4up) {

  doc_width = self.innerWidth;

  doc_height = self.innerHeight;

}
 else if (ie4up) {

  doc_width = document.body.clientWidth;

  doc_height = document.body.clientHeight;

}

 dx = new Array();

 xp = new Array();

 yp = new Array();
 
 am = new Array();

 stx = new Array();

 sty = new Array();

 for (i = 0; i < no; ++ i) {

  dx[i] = 0;                       

  xp[i] = Math.random()*(doc_width-50); 

  yp[i] = Math.random()*doc_height;

  am[i] = Math.random()*20;        

  stx[i] = 0.02 + Math.random()/10;

  sty[i] = 0.7 + Math.random();    

 if (ns4up) {                    

  if (i == 0) {

  document.write("<layer name=\"dot"+ i +"\" left=\"15\" ");

  document.write("top=\"15\" visibility=\"show\"><img src=\"");

  document.write(snowflake + "\" border=\"0\"></layer>");

}
 else {

  document.write("<layer name=\"dot"+ i +"\" left=\"15\" ");

  document.write("top=\"15\" visibility=\"show\"><img src=\"");

  document.write(snowflake + "\" border=\"0\"></layer>");

   }

}
 else if (ie4up) {

  if (i == 0) {

   document.write("<div id=\"dot"+ i +"\" style=\"POSITION: ");

   document.write("absolute; Z-INDEX: "+ i +"; VISIBILITY: ");

   document.write("visible; TOP: 15px; LEFT: 15px;\"><img src=\"");

   document.write(snowflake + "\" border=\"0\"></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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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cument.write("<div id=\"dot"+ i +"\" style=\"POSITION: ");

  document.write("absolute; Z-INDEX: "+ i +"; VISIBILITY: ");

  document.write("visible; TOP: 15px; LEFT: 15px;\"><img src=\"");

  document.write(snowflake + "\" border=\"0\"></div>");

      }

   }

}

 function snowNS() { 

  for (i = 0; i < no; ++ i) { 

  yp[i] += sty[i];

  if (yp[i] > doc_height) {

   xp[i] = Math.random()*(doc_width-am[i]-30);

   yp[i] = 0;

   stx[i] = 0.02 + Math.random()/10;

   sty[i] = 0.7 + Math.random();

   doc_width = self.innerWidth;

   doc_height = self.innerHe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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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x[i] += stx[i];

 document.layers["dot"+i].top = yp[i];

 document.layers["dot"+i].left = xp[i] + am[i]*Math.sin(d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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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tTimeout("snowNS()", speed);

}

 function snowIE() {  // IE main animation function

  for (i = 0; i < no; ++ i) { 

  yp[i] += sty[i];

   if (yp[i] > doc_height-10) {

   xp[i] = Math.random()*(doc_width-am[i]-30);

   yp[i] = 0;

   stx[i] = 0.02 + Math.random()/10;

   sty[i] = 0.7 + Math.random();

   doc_width = document.body.clientWidth;

   doc_height = document.body.clientHeight;

}

 dx[i] += stx[i];

 document.all["dot"+i].style.pixelTop = yp[i];

 document.all["dot"+i].style.pixelLeft = xp[i] + am[i]*Math.sin(d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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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tTimeout("snowIE()", sp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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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ns4up) {

  snowNS();

}
 else if (ie4up) {

 snowIE();

}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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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전사들  (0) 2017.03.08

 

윤석중

(1911~2003, 5월의 인물)

 

한국의 아동문학가. 1932년 첫 동시집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한 하였고 방정환의 뒤를 이어 잡지 《어린이》 주간을 맡았다. 우리말 동시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 〈고추 먹고 맴맴〉등 총 1200개의 동시를 발표하였고 이중 800여 개는 동요로 만들어졌다.

석동(石童)
별칭 아동문학의 아버지
국적 한국
활동분야 문학(아동문학)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3·1문화상, 문화훈장 국민장, 외솔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문학상, 세종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인촌상, 금관문화훈장
주요저서 《윤석중 동요집》(1932), 《잃어버린 댕기》(1933), 《어깨동무》(1940), 《날아라 새들아》(1983)
주요작품

동요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 〈고추 먹고 맴맴〉 〈낮에 나온 반달〉 〈기찻길 옆〉 

 

 

 

 김용(Jim Yong Kim, 金墉)은 한국계 미국인 출신의 의사이며, 현재 다트머스 대학교의 제 17대 총장이다. 그는 2009년 3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아이비 리그의 총장에 선출되었으며, 2009년 7월 1일부터 정식으로 총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하버드 의대 국제보건·사회의학과장, 동 대학 프랑수와 사비에 배뉴센터(FXB) 소장 및 브리검앤우먼스 병원(하버드 의대 병원)의 국제보건학과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중남미 등의 빈민지역에서 결핵 퇴치를위한 의료구호활동을 벌여왔고, 세계보건기구(WHO) 에이즈국장을 역임하였다. [1] 2012년 3월 23일 오바마 대통령은 김용을 세계은행 차기 총재 후보로 지명했다고 발표하였다. 2012년 4월 16일 김용은 세계 은행 총재로 선출되었고, 2012년 7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총재 업무를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화 복원논란

 

 

  피렌체공화국은 1500년대 초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두 천재화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베로키오 궁전 내 '500년의 방' 양쪽 벽에 각각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다빈치에게는 피렌체가 밀라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앙기아리 전투', 미켈란젤로에게는 피렌체가 피사에 대승한 '카시나 전투'가 그림의 주제로 주어졌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떠나면서 두 사람의 맞대결은 무산되었다. 이미 '최후의 만찬'을 완성했던 다빈치는 1505년 그림 작업에 돌입하는데 기존에 쓰지 않던 새 물감으로 벽화를 그려나간다. 이 물감을 빨리 마르지 않고 잘 흘러내리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1년여간 작업에 매달렸던 다빈치는 끝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피렌체를 떠났다.
  그로부터 50년 후 베키오 궁전이 증,개축(조르주 바사리 지휘)되는 과정에서 미완성 앙기아리 전투화는 사라졌다. 평소 다빈치를 존경했던 바사리가 다빈치의 그림을 그냥 없애지 않고 마르시아노 전투화 뒤에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마우리치오 세라치니 교수는 한 전투병이 든 초록색 깃발에서 이탈리아어로 된 문장을 발견했다.
체르카 트로바(Cerca Trova-찾으라,그럼 발견할 것이다)
  
 이 문구와 안료 채취작업을 통해 뒤에 레오나르도 특유의 안료를 발견함에 따라 뒤뒤쪽에 레오나르도의 미완성작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하마르시아노 전투화를 훼손하면서까지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화를 복원해야 되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미슐랭가이드-한식당 모란봉(2스타), 단지(1스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공로상 수여.

세계적인 타이어회사 미슐랭사가 매년 봄 발간하는 식당 및 여행가이드 시리즈로 '미쉐린 가이드'라고도 하며, 프랑스어로는 '기드 미슐랭'이라고 한다.
■ 미슐랭 가이드 발간 유래

  1900년 타이어 구매 고객에게 무료로 나눠주던 자동차여행 안내책자에서 출발하였다. 미슐랭 가이드를 탄생시킨 앙드레 미슐랭은 당시 내무부 산하 지도국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를 여행하는 운전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자는 취지 아래 무료로 배포되는 여행, 식당 정보 안내서를 펴냈다.
  미슐랭 가이드가 미슐랭 타이어 회사 부설 여행 정보국에서 발간된 것은 앙드레 미슐랭이 세계 최초로 분리, 조립되는 타이어를 발명하여 미슐랭 타이어 회사를 만든 에두아르 미슐랭의 친형으로 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타이어정보.도로법규.자동차정비요령.주유소 위치등이 주된 내용이었고 식당은 그저 운전자의 허기를 달래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호평을 받자 22년부터 유가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후 대표적인 식당지침서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
  그 후 100년의 세월동안 엄격성과 정보의 신뢰도를 바탕으로 명성을 쌓아 오늘날 '미식가들의 성서'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미슐랭 가이드 내용
  1,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책머리에 간단하게 실려 있는 여행 정보와 레스토랑 선택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빼면 그 방대한 분량은 전부가 식당과 호텔 정보에 할애되어 있다.
  전담요원이 평범한 손님으로 가장해 한 식당을 1년동안 5~6차례 방문해 직접 시음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음식맛, 가격, 분위기, 서비스 등을 바탕으로 일정 수의 식당을 엄선하고 다시 이들 가운데 뛰어난 식당에 별(최고 별 3개)을 부여해 등급을 매긴다.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달게 되는 경우에는 성대한 시상식을 치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별 3개를 달게 되는 요리사는 최고의 명성을 가지게 된다.

레드가이드/그린가이드
  숙박시설과 식당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레드가이드>와 박물관, 자연경관 등 관광정보를 제공해 주는 부록형태의 <그린가이드>가 있다.
  1957년부터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영국, 아일랜드, 베네룩스 3국, 독일 등과 같은 다른 여러 유럽국가들에 대한 레드가이드도 발간하고 있다.

 

 

 

그래핀-탄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 1개의 두께로 이루어진 얇은 막.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 즉 ‘그래파이트(graphite)’와 탄소이중결합을 가진 분자를 뜻하는 접미사 ‘-ene’를 결합하여 만든 용어이다. 2004년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연구팀이 상온에서 완벽한 2차원 구조의 그래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는데, 당시 연구팀은 스카치테이프의 접착력을 이용하여 흑연에서 간단하게 그래핀을 떼어냈다고 한다.

흑연은 탄소를 6각형의 벌집모양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핀은 흑연에서 가장 얇게 한 겹을 떼어낸 것이라 보면 된다. 탄소동소체()인 그래핀은 탄소나노튜브, 풀러린(Fullerene)처럼 원자번호 6번인 탄소로 구성된 나노물질이다.

2차원 평면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두께는 0.2nm(1nm은 10억 분의 1m) 즉 100억 분의 2m 정도로 엄청나게 얇으면서 물리적·화학적 안정성도 높다.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하고, 반도체로 주로 쓰이는 단결정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전자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다. 강도는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하며, 최고의 열전도성을 자랑하는 다이아몬드보다 2배 이상 열전도성이 높다. 또 탄성이 뛰어나 늘리거나 구부려도 전기적 성질을 잃지 않는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그래핀은 차세대 신소재로 각광받는 탄소나노튜브를 뛰어넘는 소재로 평가받으며 ‘꿈의 나노물질’이라 불린다. 그래핀과 탄소나노튜브는 화학적 성질이 아주 비슷하고, 후공정을 통해 금속성과 반도체성을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탄소나노튜브보다 균일한 금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핀은 구부릴 수 있는 디스플레이전자종이, 착용식 컴퓨터(wearable computer) 등을 만들 수 있는 전자정보 산업분야의 미래 신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반야월 : 한국의 대중가요 가수이자 작사가. 1950년 <울고 넘는 박달재>,

               1956년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등 최고의 히트곡을 작사하였다.
              
1917년 8월 1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창오()이다.

               1942년부터 예명인 반야월을 사용하였다. 1939년 가수로 데뷔하였으며 이때는 진방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추미림(), 박남포()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진해농산학교를 다녔으나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였고 1939년 태평레코드사에서 주관한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가수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진방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고 본격적인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0년 <잘있거라 항구야>, <불효자는 웁니다> 등의 히트곡을 불렀고 1941년 <고향만리>, 1942년 <꽃마차>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반야월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칭송하는 <결전태평양 일억총진군> 등의 노래를 불러 오점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가수보다는 작사가로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으로 근무하였다. 그가 작사한 대표적인 노래는 1950년에 발표한 <울고 넘는 박달재>와 1956년에 작사한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가장 유명하다.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이사,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노래를 작사하였고 많은 히트곡을 제작했다. 전국적으로 그의 노래비는 곳곳에 세워졌으며 그의 고향 마산에서는 반야월가요제가 열였다. 1991년 대중음악과 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로 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2010년 자신이 친일 군국가요를 부른것에 대해 '매우 후회스럽고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유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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