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 2017 02 12 - 시민의눈(부정선거 감시활동/신비 김상호 출연)

 


파파이스( 2017. 2. 3.)-시민의눈 

 

[시민의 날개]유창렬 집행위원장+[시민의눈]김상호 대표제안자+송병우 플랫폼팀장 "의문의 노트북"


[팩트9뉴스] 영상기획/외침(15.1.2)-팟캐스트 '새가 날아든다' 진행자 신비, 김상호씨의 외침 (2015. 1. 2.)  


새가 날아든다 3/19(월) 1부[민주당의 자신감, 이명박 구속-지방선거-개헌]  


새가 날아든다 3/20(화) 1부[변하고 있는 안철수의 말/윤상 감독 종북논란/MB 구속영장 청구!]  


새가 날아든다 3/21(수) 1부[도우미 홍준표/이시형은 검찰을 응원하고 있다?!/기독계도 뇌물이라고?!]  


새가 날아든다 3/22(목) 2부[구속 앞둔 이명박의 멘탈은?/삼성의 용인 땅값은 누가 움직였을까? With 선대인]

조문기 회고록 1장. 어린 시절-③ <태극기 사건>


  생전 처음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4학년 때의 일이다.

  1937년, 일제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창 전쟁 중이었다.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실은 열차가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 앞을 통과했다. 우리들운 그때마다 역으로 나가 양손에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러야 했다. 교장은 매일 조회시간에 대일본제국이 승승장구하여 세계를 일본의 앞마당으로 만들 것이라고 훈시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도 승전 소식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일본 이야기만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정말 스런 줄로만 알았다. 일본은 우수하고 일본인처럼 되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위대한 일본을 위해서 전쟁에 자원하는 것이 조선인이 해야 할 자랑스러운 선택이라고 연일 떠들었다.


  그런(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책보를 둘러메고 기를 받아 역에 나가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만세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외조부가 안채 마루 끝에 나와 있었다.


"문기야! 그 손에 든 게 뭐냐?"


 손에는 방금 역에서 흔들던 일장기가 들려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 준 국기예요."


나는 철없이 일장기를 흔들어 보였다.


"이놈! 예가 어디라고 망측한 걸 집으로 들이는 게냐!"


외조부의 격노한 얼굴은 성난 호랑이처럼 무서웠고 눈빛에선 불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놀란 나는 어쩌러 줄 몰라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외조부가 쏜살같이 달려와 일장기를 빼앗더니 박박 찍어 바닥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 이놈! 내일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순간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나는 대문을 차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외조부는 내게 자상한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사는 게 안쓰러웠던지 밥을 먹을 때는 겸상을 했고, 고기반찬이며 생선을 가까이 놓아 주셨고 밤마다 곶감이나 약식을 따로 챙겨 주곤 하셨다. 백발이 성성한 분이 손수 잠자리를 봐주며 친손자보다 더욱 각별하게 보살펴 주셨다. 그런 외조부가 돌변해서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그저 거럽고 고깝기만 했다. 한참을 울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눈물이 말라 나오지 않을 때쯤 낮게 있었던 일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무엇이 외조부를 그렇게 화나게 했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유는 알 수 없고 분노가 치밀어 오늘 뿐이었다.


'왜 우리 부모는 나 하나 챙기지 못해 외갓집 신세를 지게 하는 걸까?'

외조부의 깊은 뜻을 알 길 없는 나는 마냥 서럽고 고까워서 부모님을 원망했다. 해가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을 내려오며 나는 결심했다.


'좋다. 더는 외갓집 신세 안 진다. 내일 아침에 걸어서라도 집으로 간다.'

잠자리에 들 시간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느 때 같으면 외조부의 바로 곁 아랫목에서 잠들었겠지만 그날은 문지방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외갓집 신세는 오늘까지다. 날이 새면 집으로 돌아가자. 붙잡아도 돌아보지 않을 거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외조부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잠배를 피워 물었다.


"문기야, 이 할아비가 밉지?"


외조부의 자상한 말씀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구렸다.


"철딱서니 없는 놈, 아무럼(아무러면) 널보고 정말 가라 하겠느냐?"


외조부는 긴 한숨을 연이어 내위었다.


"네가 어려서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얘기를 하는 게 좋은 것 같구나."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지. 무슨 말을 해도 난 날이 밝으면 집으로 갈 거야.'


속이 배배 꼬인 나는 입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다 얘기할 테니 일어나 앉거라."


외조부가 이불을 들추고 나를 일으켜 앉혔다.


"문기야, 이 할아비 말을 잘 듣거라. 네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다 거짓부렁이다. 왜놈들이 거짓을 꾸민 거야."


(그러며)그러면서 외조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들려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외조부는 당신의 목격담을 섞어 가며 비극적인 우리 역사를 어린 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아 주었다."


"일본공사 미우라가 일본에 반대하는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 깡패들을 시켜 궁궐에 침입해 대신들과 궁녀들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칼로 난자했다. 증거를 없애려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1905년, 군대를 동원해 궁으로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황제에게 나라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을사조약에 옥쇄를 찍도록 협박했다. 고종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나라를 팔아먹을 법한 대신들을 구슬렸다. 역적놈들은 자신에게 떨어질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황제의 승인도 받지 않고 나라의 주권을 팔아 버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역적놈들은 한술 더 떠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이라 떠받들었고, 그 대가로 은사금을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은 짐이 승인한 것이 아니라는 친서를 발표한 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세계만방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무력을 앞세운 을사조약을 파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첩자가 있어 비밀이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의 방해 공작 때문에 밀사들은 끝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이준 열사는 회의장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자결하였다."

"고종 황제가 특사를 파견한 것을 꼬투리 잡아 일본은 이완용, 송병준을 앞세워 황제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일제의 무력 앞에서 결국 순종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었다. 순종이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일본 군부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합방 조약을 강행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멸망하였고 이후로 총독부가 들어서고 오직 일본 왕의 지시만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고종 황제가 돌아가시고 왜놈들에게 독살됐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그놈들은 명성황후에 이어 틀림없이 황제도 독살하였을 것이다."


  곰방대를 든 외조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느라 외조부는 이야기 도중 몇 번이나 숨을 돌렸다. 나도 듣다 보니 치가 떨리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의 머릿속에서 세상이 모두 뒤바뀌는(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알겠느냐? 오늘 이 할아비가 일장기를 찢어 버린 이유를 말이다."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날까지는 이 집에 왜놈 기는 못 들인다."


  총독부가 들어서는 날 외조부는 고향으로 내려와 칩거를 시작했다. 초야에 붇혀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고개 너머 추계리가 송병준의 고향이라 한날한시도 이를 안 간 날이 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외조부는 길게 담배 한 모듬을 빨고는 자리에 들었다.


 "늦었다. 자거라."


  불을 끄고 누웠지만 이번에는 왜놈들의 만행에 치가 떨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나마 외조부의 깊은 뜻을 곡해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려 외조부의 뒷보습을 보았다. 외조부의 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넓게 보였다.


 "할아버지, 그럼 조선의 국기는 없는 건가요?"

 "보고 싶으냐?"

 "예, 꼭 보고 싶어요."

 "그전에 이 할아비와 약속하자. 오늘 들었던 얘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왜놈들은 잔인한 놈들이다. 명심하거라."

 "예"


  나는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대답했다.


  "향교가 어디 있는지 알지? 향교 대문에 태극기가 있느니라."


  외조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재차 강조를 했다.


 "문기야, 이 할아비가 네게 큰 짐을 안기는[지우는] 게 아닌가 싶구나. 오늘 얘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거라."


  외조부 승지 이조영(李肈榮). 그분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왜놈들, 역적놈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분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평생을 지배했다.


  날이 밝자 나는 향교로 달려갔다. 이른 새벽이라 인기척이 없었다. 굳게 닫힌 향교 대문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보였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울대를 눌렀다. 눈앞에 신천지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거대한 태극 문양이 열네 살 어린 소년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태극기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교실 앞이었다. 

  

  "너희들, 향교에 안 갈래?"

  "향교는 왜?"

  "거기에 아주 특별한 게 있거든."


  모두들 반장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우르르 따라 나왔다. 향교 앞에 이르러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본 신천지에 대한 얘기를 했다.


  "너희들 우리나라 국기 본 적 있어?"

  "그럼, 매일 보지. 국기는 학교에 있잖아."

  "그건 일장기고 태극기 말이야. 일본 기 말고 우리나라 기 말이야."

  "일장기는 뭐고 태극기는 뭐야?"

  "이게 우리나라 태극기야 절대로 잊으면 안 돼."


  나는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국기를 알려 주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기마저 못 쓰게 한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니 교장의 훈시가 쩌렁쩌렁 교문 밖으로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영락없이 지각생으로 벌을 서야만 했다.


  "이놈들! 떼거지로 어디 가서 놀다 온 거야?"


  주임 선생이 무섭게 다그치자 한 녀석이 겁먹은 얼굴로 실토했다.


  "문기가 태극기 보여 준다고 향교에 다녀오느라 늦었어요."


  주임 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이 순식간에 커졌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고 교장은 나를 퇴학시키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벌을 서는데 손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주재소로 끌려갔다. 그때서야 외조부와의 약속을 어긴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주재로의 순사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어린아이를 싸늘한 철창에 가둘 수는 없었던지 숙직실에 가둬 놓았다. 숙직실에 갇힌 나는 넋을 놓고 나라 잃은 설움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태극기를 보는 게 큰 죄가 되는구나 생각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고함 소리에 눈을 떴다.


  "이놈들아! 우리 외손자 내놔라!"

  "어르신 제 말씀 좀…"

  "시끄럽다, 이놈아! 어디 네 놈 이바구(이야기) 듣자고 예까지 온 줄 아느냐! 당장 우리 외손자 내놔!"


  외조부는 책상을 탕탕 피며 으름장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순사들과 소장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순사 하나가 숙직실로 달려왔다. 주재소 안에서 외조부의 모습은 장군처럼 당당해 보였다.


  "어르신, 학교에서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저희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증서 한 장만 써 주시면 제가 조처해 보겠습니다."


  조선인 순사들은 철없는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봐줄 수 있겠지만 신고를 한 교장을 일본인이다. 일이 커지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다. 외조부도 그 대목에 가서는 순순히 소장을 말을 따랐다. 대쪽같은 성품을 가진 분이었지만 손자의 장래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분노와 치욕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었다. 새벽에 했던 약속만 지켰어도 할아버지에게 이런 치욕을 안겨드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고두고 곱씹으며 맹세했다.


  "이놈들! (훗날) 이날의 치욕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리라."

  1장. 어린 시절-② <외가 생활>

  외가댁은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는 용인 부근의 양지마을이었다. 외가댁에 도착하여 외조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기 전에 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외가댁에 오기 전까지는 막연한 동경으로 들떠 있었지만 막상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자 서글퍼졌다.


  외가댁에는 외조부와 작은 외숙모, 이종 사촌형 둘과 누나, 5살 된 동생이 살고 있었다. 장남인 삼촌은 본처와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외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명절 때만 내려왔다.


  외조부는 고종 31년(1984) 전시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구한말 고종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학자이기도 했다. 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반납하고 향리인 양지 마음로 돌아와 은거하며 독서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지만 큰 벼슬을 했던 분이라 군수나 경찰서장이 새로 부임해 오면 인사를 드리러 찾아오곤 했고, 일년에 한 번 향교에서 제사를 모실 때는 외조부가 주관을 했다.


  다음 날 나는 외조부를 따라 양지보통학교에 갔다. 일본인 교장과 주임 교사는 나의 성적표를 보고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외조부의 기세에 눌려 빠르게 수속을 밟아 주었다.


외가댁과 학교는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다. 다벼락에는 사람이 드나들 만한 개구멍이 있어서 학교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도 수업시간에 늦지 않았고 점심 시간에도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매송보통학교와 달리 양지보통학교는 건물도 컸고 학생 수도 두 배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6년제 보통학교였으며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학교 교실마다 일장기 곂에 낯선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는데, 이 학교를 세운 송병준 백작이라고 했다.


사랑방에서 외조부와 잠을 자게 된 나는 잠자리에서 송병준 백작에 대해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송병준 백작이 누구예요?"

"백작은 무슨 백작! 그놈은 역적놈이야!"

"왜 역적인데요?"

"왜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역적이지."

"나라가 있는데 무슨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그러세요?"

"넌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른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게다."

  그 후 나는 외조부로부터 "송병준 역적놈", "송가 씨알머리들"이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게 들어야 했다.


  양지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오면서 나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성적이 형편없어 전입 당시 눈총을 받던 내가 그해 기말고사에서 우등생이 됐고 다음 해에는 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루바이 김분조'라는 별명이 생겼다. 번역하자면 '조문기 우쭐댄다'는 뜻인데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흑판에 커다랗게 '요루바이 김분조'를 써 놓고 나를 놀렸다. 나는 우쭐대거나 으스대는 따위의 교만과는 거리가 멀었다.천성이 내성적이고 외갓집 신세를 지는 터라 탈잡는 이가 없어도 기가 죽어 있었다. 언제나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으로 시름에 빠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를 그렇게 놀려댄 아이들은 송가 씨알머리들의 자식들이었다. 송백작의 집이 있는 추계리는 송씨들의 집성촌이었는데 이들의 위세가 대단했다. 송가 씨알머리들은 학교에서도 자주 말썽을 부렸지만 일본인 교장조차 송씨들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못하고 덮어주곤 했다. 나의 별명은 '요루바이 김분조'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조문기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칭찬을 했다. 당시는 수업시간에도 일본어로 말할 때였으니 "깃또 모노니 나루"라고 하지만 말을 교묘히 바꾸어 놀렸다. '게모노'는 짐승을 뜻하니, "조문기는 틀림없이 짐승이 된다"고 놀려댄 것이다. 아이들의 놀림으로 나는 더욱 말없는 학생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개구멍을 통해 집으로 왔다. 특히 송가 씨알머리들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외조부의 분노는 무의식적으로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