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린 시절


<내 고향 야목리>

나의 고향은 100여 호의 농가가 모여 사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초가집에서 소작을 부치며 살았지만 우리 집안은 제법 많은 땅을 가진 부자였다.

할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소작으로 주고 첩실을 거느리며 한가롭게 한량으로 살다가 내가 다섯 살 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훤칠한 키에 호남이었던 아버지는 승지 벼슬까지 지낸 집안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나는 그중 차남이다.

장남인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가 대를 잇기 위해 야목리로 돌아왔지만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었고 어린 나에게 야단 한 번 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손님 같은 분이었다. 제사와 명절날에만 집으로 돌아왔다가 제사가 끝나기 무섭게 땅 문서를 챙겨들고 나갔다. 아버지는 무슨 일인가에 열정을 쏟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게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우리 집은 손바닥만 한 밭을 낀 초가집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몰락해 있었다.


더듬어 보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단편적이다. 후레 내가 일본에서 귀국해서 집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장독이 하도 많아 호기심이 생겨 하나씩 열어 보았다. 맨 뒷줄의 큰 장독 안에 책이 몇 권 들어 있었다. 책은 보통 장독에 넣어 보관하지 않는다. 무언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물건이다 싶어 남이 불세라 주위를 살치며 책을 꺼내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붉게 장정을 한 표지에 '조선독립소요사'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총독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조선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이었다. 

  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언젠가 백발이 성성한 외조부님이 나를 곁에 두고 혼잣말처럼 푸념하섰다. 

 "애비 때문에 네가 고생이구나. 되지도 않는 일을 한다고 저렇게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는 뒷전이니…'

  외할아버지는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끝내 그것을 들어 보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던 걸까? 조선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기록을 왜 숨기고 있었던 걸까? 해방 이후 최근까지 아버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기회가 될 때마다 각종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싫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승지 벼슬을 지낸 대쪽같은 성품의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전통교육을 받으며 자란 분이다. 위로 오라버니 하나를 두고 외동딸로 고이 자라 조씨 문중의 며느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온화하고 정갈하신 성품으로 큰살림을 하실 때에도 집안에서 거친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밤이면 호롱불 아래 다소곳이 앉아 바느질을 하거나 편지를 쓰곤 했다. 

  내가 보통학교를 들어갈 무렵 우리는 살던 집에서 나와 방 두 칸과 광이 딸린 초가집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이 간다지만 우리는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저앻야 할 처지로 몰락해 버렸다. 이사한 집은 장마에 흙담이 내려앉아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집에서 어머니는 어린 나와 여동생을 위해 바느질을 하고 이 집 저 집에서 쌀을 꾸고 군불을 지필 솔가지를 장만하고 작은 텃밭을 일구었다. 양갓집 살림 살던 분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변화였지만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큰집 살림을 할 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었던 터라 어려운 처지를 당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너나없이 가난한 살림었지만 작은 정성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던 때다.

  외가에서 학교에 다니던 형은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왔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얌전한 여동생은 한없이 곱게만 보였다.


  한없이 어질고 자애롭게만 보이던 어머니는 심지가  곧고 사려 깊은 분이었다. 후일, 내가 일본에서 막 돌아왔을 때다. 큰 뜻을 품고 거사를 준비하던 중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젊은 혈기에 일을 허술하게 처리했다가는 하루살이로 사라질 수도 있던 때였다. 어머니는 내 표정에서 심란함을 읽으셨는지, 하루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징벙으로 끌려가더구나."

  "…예."

  "뜻을 세웠으면 밀고 나가거라. 떳떳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남자다운 게다."

  너무도 의외였다. 어머니의 말씀에 머리가 맑아졌다. 후에도 삶의 고비가 올 때마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나를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내게 대쪽 같은 의지를 심어 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 마음의 고향 같은 분이다.


  야목리 농가의 9할이 소작농이었다. 자기 땅이 있다고 해도 자급할 능력이 되는 집은 두어 가구에 불과했다. 수원 갑부 양승관이 마음 땅 대부분을 소유했고 마름을 두어 관리했다. 마름 집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창고는 추수 때가 되면 쌀가마니로 그득했다. 마을의 쌀이 모두 그곳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마음 사람들의 생활은 형편없었다. 두어 벌 바지 저고리에 짚신 차림으로 한 해를 나고, 겨울이면 동상으로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먹고사는 일이 빠듯해서 하루 세끼 챙겨먹는 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쌀 두어 줌에 나물을 넣어 밥을 지었다. 나물에 밥이 몇 알 달린 나물밥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쌀을 팔아서 돈을 준비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월사금 20전을 감당하지 못해 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예닐곱 명에 불과했다.

  

  매송면에 있는 매송보통학교는 전교생이 300여 명인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보통학교는 원래 6년제였으나 매송보통학교는 4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다. 교과서는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었고, 음악 시간에는 일본 동요만 불렀다. 매일 아침마다 열리는 조회시간에는 운동장에 열 맞춰 서서 일본인 교장의 잔소리를 들었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솔방울 공출을 하러 나갔다. 오전부터 수업은 제쳐 두고 농가에서 공출해 온 가마니를 끌고 산에 올라가 온 산을 훑었다. 공출이 없는 날은 1인당 솔방울 한 자루씩을 가져와야 했다. 학교생활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붙인 과목은 조선어였다.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글로 대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따로 복슴을 하지 않아도 보는 즉시 머릿속에 들어왔다.


  야목리에서 학교까지는 십여 리 길로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다침에 마을 아이들이 모여 함께 등교했는데, 어머니가 옆집에서 쌀을 꾸어다 아침을 준비하는 날은 여지없이 지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야단 한 번 맞아 본 적 없었는데 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지각대장에 몇 달씩 월사금을 내지 못했으니 매일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회초리를 맞거나 교실 뒤에서 벌을 서며 수업을 들어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학교 가기가 지옥 가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꾀를 냈다. 집에서는 평소처럼 책보를 메고 나와서는 마을 앞 모퉁이를 돌아서면 곧바로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진달래로 따먹고 핅도 캐고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한나절이 금방 지나갔다. 배꼽시계가 요란할 즈음이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면 누가 보아도 하굣길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등산대장! 오늘은 또 산에서 뭐 하고 놀았어?"

  일주일에 3일은 산에서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나를 두고 아이들은 등산대장이라고 불렀다.

  "내일은 조선어 시험인데 학교 올 거지?"

  "응."

  선생님에게 모진 소리를 들어도 조선어 시간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서둘러 학교에 갔다. 그나마 퇴학당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조선어 시간이 일주일에 3일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이었다. 그날도 또래 녀석들과 자치기를 하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두 바가지나 마시고 들어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날은 물로 배를 채우고 일찍 잠드는 것이 상책이었다.

  "문기 들어왔니? 이리 좀 건너오거라."

  방으로 들어서는데 안방에서 어머니가 불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 게 심상치 않았다. 학교에 안 가는 게 들킨 게 아닐까 하여 겁이 났다. 방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소반 위에 약식과 백설기, 곶감 같은 큰집 제사 때나 볼 수 있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왜 이리 늦은 게야? 어서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터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방 안을 살펴보니 여동생이 어머니 다리를 베고 잠들어 있었고 반닫이 옆에는 작은 봇짐이 놓여 있었다.

  "월사금 때문에 학교 다니기 힘들었지? 말 안 해도 다 안다. 이제부터 월사금 걱정 안 해도 된다. 내일 외가댁 으로 가자."

  다음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댁으로 갔다. 가난에 고생하는 시집간 딸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자 나를 데려오라 한 것이었다.

  수원까지 30리 길을 걷는 동안 어머니의 표정을 심란해 보였지만 나는 내내 들떠 있었다. 이제는 월사금 때문에 망신을 당하지도, 끼니때 우물가에서 물배를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저 신나기만 했다. 당시로서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부민관 폭탄 의거) 조문기 선생 회고록



                                                일평생 독립운동에 투신, 광복회/반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16년 작고

 

서문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 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 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게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5년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민족 반역자)들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 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 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

 

엄밀히 말하면 8.15니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

 

매일 일본 황실을 향해 머리를 굽실거리며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치며 민족 구성원을 전쟁터로 내몰던 일제 관리들이 해방 후에 이 나라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식민지 민족말살교육의 첨병이었던 훈도들이 모조리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 일선 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민족을 배신하는 데 앞장섰던 성직자들은 여전히 존경받는 성직 지도자로 군림했다. 민족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고등계 형사들과 순사들이 모조리 국립 경찰의 간부가 되어 항일운동 세력을 낱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 경찰들의 손에 다시금 구금되어야만 했다. 항일 운동가들을 토벌하던 황군 장교들은 해발 후 빨갱이를 쳐부수는 국군 장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쿠데타로 군사 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이 땅 주류 세력의 뿌리가 친일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이 나라는 친일파들의 낙원이라 부를(불릴) 만하다. 친일파들의 철옹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실례를 보자.

 

지금 전국에서 친일파들의 동상, 공적비, 기념비, 송덕비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키워 놓은 후계 세력들은 친일파들을 본받고 따르라고 각종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60년을 공들여 쌓아 놓은 굳건한 친일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집권 세력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 보려고 칼을 빼들었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가로막는 친일 세력의 벽에 부딪쳐서 절절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친일파가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한 나라참으로 하늘이 무섭고 역사가 두렵고 선열들의 호통소리가 들리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 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3년 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이란 책에서 조문기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좌나 우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알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명성이란 것은 당초에 없었으니 그 말만 뺀다면 정곡을 찌른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내게는 이념도 사상도 조직도 없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상태로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독불장군에다 좌충우돌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 지난 세월도 꽤나 거칠고 험난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밍더지지 낳을 만큼 끔찍한 역경도 많이 체험했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다 보니 철부지의 치기, 영웅심에다 큰 목표에 대한 사명감이 맞물리면서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탓일 게다. 나이 80이 된 오늘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대로 산다. 그 실을 지켜 온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지난날에 (대한) 후회는 없다.

 

서툰 내 글솜씨가 이런 내 진솔한 민족애를 얼마나 담아낼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의 대부분이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 보니 행여 역사 한구석이라도 더럽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이 책을 내가 민족에세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라 생가갛고 역사의 한구석에 조용히 세워 놓고 민족의 품속에 안겨 눈감고 싶다.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지적 재산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DAUM>

 

다음이 원래 이렇게 통제가 심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언제부터 이랬는지 더듬어 돌아보니 카카오와 다음에 병합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나는 내가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을 때 해커가 들어와서 HTML 코드에 릴 도박 사이트 연결 소스를 삽입

 

 <!DOCTYPE html PUBLIC "-//W3C//DTD XHTML 1.0 Transitional//EN" "http://www.w3.org/TR/xhtml1/DTD/xhtml1-transitional.dtd">
<html xmlns="http://www.w3.org/1999/xhtml">

하면서 제재 조치를 당하게 되었고 지금 현재 나의 잘못도 아닌 사유에 의해서 블로그 페이지가 삭제되고 계정은 사용 제한이 걸리게 되었다. ㅠㅠ;;

 

망할 w3 사이트와 망할 해커 같으니라고~내가 눈 감는 순간까지 너희들을 저주하리라~

(이 망할 사이트는 들어가면 악성 코드 감염될 것 같아 차마 들어가지 못하겠다. 똥 밟기 싫어!)

 

다음이 정책이라고 주장하며 마구 휘두르며 저지르는 지적 재산권 침해, 심각한 수준이다. 상식적인 인터넷 사용자라면 이들이 주장하는 정책이 얼마나 폭압적이며 터무니없는지 동감할 것이다.

다음 블로그나 티스토리에 올리는 동영상 및 사진은 다음TV팟과 자동의 연동이 되며 올리는 순간 위와 같은 제약을 받게 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사례를 찾아보니 굉장히 많았다. 아래는 다른 사람들이 다음 측에서 당하고 기분 나쁘고 억울하다고 올려 놓은 글들이다.

 

 

이런 이상한 조치들, 아직 끝장나지 않은 현 정권(닭머리와 황굴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수호하는 이념(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 실종된 나라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다음은 지금의 억압적 정책을 개선하라, 그렇지 않으면 곧 이용자들의 외면으로 사운이 기울 것이다. 카카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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